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지난달 23일 한 관람객이 호찌민 전쟁박물관에 걸린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이 박물관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베트남의 전쟁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한 지난달 23일 한 관람객이 호찌민 전쟁박물관에 걸린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이 박물관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베트남의 전쟁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3년 베트남 중부 지역의 작은 마을 미라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남자가 일하러 가던 중 베트남전쟁 때 죽은 아내와 자식들의 유령을 봤다. 이들은 민간인 대학살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엔 임시로 얕은 무덤에 묻혔다. 남자는 이들을 새로운 묘지로 이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 오랜 시간 지체됐다. 그래도 지인들에게 돈을 열심히 빌리러 다니며 이장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유령을 본 직후 한 부유한 친척이 그를 찾아왔다. 이장에 필요한 비용을 선뜻 내놨다. 친척은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 유령이 꿈속에 나타나 당신을 도와주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친척의 도움으로 이장을 할 수 있었다.

그저 신기하고 특이한 유령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선 이런 유령을 봤다는 이가 많다. 이 유령들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5~1975년 치러진 베트남전쟁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다. 베트남 사람은 이 영혼이 지금도 존재하며 그들 곁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마을] 전쟁 트라우마…그들에게 기억은 곧 치유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단순히 장난처럼 떠도는 유령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은 베트남의 전쟁 유령을 다룬다. 전쟁 영웅도, 조상도 아닌 유령을 학술적으로 분석해 베트남전쟁 희생자에 대한 기억이 주는 사회적, 정치 경제적 의미를 조명한다.

저자는 2007년 ‘인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기어츠상’을 받은 권헌익 사회인류학 교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의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국에서 2008년 발간된 이 책은 이듬해 뛰어난 동남아시아 연구서에 주는 ‘조지 카힌상’을 받았다.

권 교수는 베트남에서 발생한 잔혹한 폭력과 대규모 죽음의 역사를 치밀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동안 미국 등 서구 전쟁의 아픔은 많은 학자와 후손에게 기억됐다. 반면 베트남을 비롯한 비서구 지역의 아픔은 잘 다뤄지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베트남 사람에게 이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유령 이야기로 잘 드러난다. 저자는 “베트남의 유령 문화는 비합리성이나 무지몽매의 표현이 아니다”며 “그들의 역사적 경험, 도덕적 가치 등과 복잡하게 연동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베트남 사람은 전사자, 마을 주민의 무덤뿐만 아니라 외지인의 무덤까지 묵묵히 지켜오고 있다. 이곳에서 싸운 외국 군인조차 모두가 기억해야 할 전쟁 유령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기도도 올린다. 외지인의 영혼을 마을 터주신으로 삼기도 하고, 살아있는 자가 입양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베트남 사람은 망자가 살아있는 자에게 기억되고 공유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믿는다. 여기엔 외지인도 예외가 아니며, 이는 베트남의 개방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망을 보여준다. 역사의 상처와 고통을 넘어 인류의 연대를 지향하는 창조적인 문화적 실천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이야기지만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대규모 살상은 6·25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 유령 현상에서 관찰되는 화해와 연대의 가능성은 아직도 냉전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사회에 의미심장한 윤리적·실천적 교훈을 남긴다”고 강조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