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논란이 끊이지 않던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문제에 정부가 처음으로 체계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동안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정해 지역 주민의 반발을 샀던 것에서 벗어나 지방자치단체 및 국민과의 소통 절차를 거쳐 2028년까지 부지를 선정하고 2053년께 본격 가동한다는 중장기 그림을 내놓았다. 부지 선정에만 무려 12년이 걸리는 셈이다. 하지만 로드맵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고준위 방폐물에 비해 방사선량이 50억분의 1에 불과한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장 부지 선정도 20년 가까이 걸렸기 때문이다. 로드맵에 나온 시한은 내년부터 부지확보 작업이 시작된다고 가정했을 경우인데, 관련법이 언제 국회를 통과할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 시한은 계속 뒤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원전 방폐장 부지 선정에 최소 12년…주민 반발·보상 '산 넘어 산'
○천문학적 보상비용 예상

국내 원자력발전소는 고준위 방폐물을 자체 보관하고 있다. 2019년 월성원전을 시작으로 한빛·고리원전(2024년) 한울원전(2037년) 신월성원전(2038년) 등의 저장시설이 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정부는 추산하고 있다. 별도의 처리장 건설이 필요한 이유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은 1983년부터 아홉 차례 추진됐으나 매번 무산됐다. 정부가 부지를 정한 뒤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해 지역주민과 환경단체, 정치권 등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다만 중·저준위 방폐장은 지자체로부터 공모 신청을 받아 지난해부터 경북 경주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고준위 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자체에 어떤 ‘당근’을 줄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경주에는 28개 지자체 사업에 국비 8952억원 등 총 1조1645억원이 지원됐다. 이와는 별도로 특별지원금 3000억원을 받았고,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까지 경주로 이전했다. 앞으로도 27개 사업에 6448억원이 추가 지원될 예정이다.

중·저준위보다 주민들의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고준위 방폐장은 얼마나 더 많은 비용이 들지 예상조차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지역 이기주의를 달래기 위해 경제적 보상을 하는 식으로 해결해선 곤란하다”며 “원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한편 탈원전 및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부지선정 시한을 2028년으로 정한 것도 논란을 낳고 있다. 2028년은 차차기 정부 임기 마지막 해다. 정치권 관계자는 “현 정부 내에서는 책임질 일을 하지 않고 차차기 정부로 떠넘기는 일종의 ‘폭탄 돌리기’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해외 처분도 검토

정부는 부지 선정의 어려움을 고려해 고준위 방폐물을 해외에 보관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가장 유력한 국가는 호주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다른 나라의 방폐물을 수입해 보관해 주는 나라는 없다”며 “호주가 관련법을 개정해 방폐물 보관사업에 뛰어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우라늄 주산지인 남호주 주(州)는 2012년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국제 우라늄 가격이 폭락하자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방폐물 처분장 유치에 나섰다.

남호주주가 방폐물 보관사업을 시작하면 2020년대 후반부터 매년 50억호주달러(약 4조원)의 수입을 안겨줄 것으로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망했다. 서 교수는 “한반도 밖으로 사용후 핵연료를 내보내려면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며 “정부가 이를 고려해 부지 선정 기간을 넉넉히 잡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나온 폐연료봉 등을 말한다. 사용후 핵연료라고도 하며 30만년이 지나야 천연 우라늄 수준으로 방사능이 줄어든다. 원전과 병원 등에서 사용한 작업복, 장갑, 부품 등 방사능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저준위 폐기물과 구분된다.

세종=이태훈/오형주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