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상시 청문회, 국회의 '셀프 권력' 어디까지
오바마는 행정명령으로 입법을 대체해 왔다. 의료개혁도 이민법도 입법 없는 행정명령으로 시행됐다. 공화당은 한국의 민주당처럼 거의 모든 오바마 입법을 좌절시켜 왔다. 예산안을 거부하면서 정부를 마비시킨 것도 다반사였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올랑드도 긴급명령으로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어느 나라 의회든 노동개혁이나 국가경쟁력 강화, 구조조정 같은 주제를 다루기에 적절치 않다는 사실이 프랑스에서도 입증됐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서글프다.

국민들의 분열적 성향이 반영되면서 정치는 점차 의사 무능력으로 치닫고 있다. 모든 나라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필연적으로 떨어진다. 길어야 1년 내지 1년6개월이다. 더는 지루해서 정치대중이 견디기 힘들어한다. 5년은 너무 지겹고 이는 지도자나 국민이나 다를 것이 없다. 고(故) 노무현은 “3년도 길다”고 탄식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기분을 느낄 것이다. 국회는 대통령들을 좌절시키고 발목을 잡아왔다. 최근의 한국 총선은 더욱 그랬다. 대통령을 좌절시키면서 언론과 유권자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유권자들은 마치 조울증처럼 절망과 환호를 반복한다.

총선은 놀랍게도 내각제적 정당 구조를 만들어 냈다. 새누리당이 마저 분열하면 4당 체제가 완성된다. 국회선진화법은 개정할 필요도 없이 정치구조 속에 기정사실화됐다. 정의화 의장은 엊그제 19대 국회 마지막 날 오랫동안 결심해 왔던 정변을 감행했다. 새누리당이 분열된 틈을 타 ‘국회 상임위가 상시 청문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국회법 개정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정부를 무력화하는 또 하나의 시도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승리를 거뒀다. 국회법 개정은 정 의장이 제4의 정치적 파당을 만들어 내는 적절한 자양분이 될지 모르겠다. 국회의원들의 손에 권력을 더 꽉 쥐여주는…, 떠나는 국회의장의 선물이었다.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 권력을 강화하려는 잇단 시도 중 하나다. 유승민 파동을 낳았던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 심의권’은 박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무산됐다. 행정부를 국회의 시녀로 만들자는 데 반대하는 의원은 별로 없다. 그런 은밀한 공감대가 엊그제 다시 상시 청문회법을 통과시켰다. 중요한 안건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국정감사 등의 조건이 없어도, 상임위 소관사항이기만 하면 일반 의결정족수로 수시로 청문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는 그렇게 스스로 권력을 강화시켰다. 셀프 권력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국회 개혁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총선과 더불어 물 건너갔다.

절제라고는 없는 국회의 권력 강화는 박근혜 정부가 아니라 모든 정부를 무능에 빠뜨릴 것이다. 지금은 박근혜를 좌절시켰다고 환호할지 모르지만 장차는 모든 정부와 대통령을, 그리고 기어이는 국민을 좌절시킬 것이다. 지금까지도 국회선진화법이 구조적 무능력 상태, 즉 금치산의 정치를 만들어 왔다.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 중다수결’은 의안을 맞바꾸는 로그롤링(log rolling)만 강화하고 말았다. 역겨운 ‘법안 맞바꾸기’는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무능한 정치를 낳고 있다. 중다수결이 될수록 개혁입법은 통과가 어려워진다. 만인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 법안은 포퓰리즘 입법이거나, 착하게 살자는 식의 추상적 입법밖에 없다. 악법이 양법을 구축하는 우중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돌아간다.

혹자는 미국식 상시 청문회를 말하지만 허망한 주장이다. 미국 의회에는 정부에 대한 국정조사도 현안질의도 본회의 질의도 없다. 아니 그런 절차를 모두 합쳐 청문회를 열고 있는 것이다. 수시청문회는 사법과 행정권력 위에 군림하는 정치권력, 다시 말해 모든 자를 무릎 꿇리는 인민재판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상시화되는 것은 청문회가 아니라 정쟁이다. ‘4색 당쟁’이 잇단 사화를 만들어 내는…, 후기 조선은 그렇게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머지않은 장래를 생각하면서, 거부권 행사를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걱정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