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예술, 아이디어인가 표현인가
가수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그리게 한 그림들이 여러 가지 차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작품을 산 사람들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구매자에게 예술가의 존재는 오직 작품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과연 조영남의 그림인가, 이름 모를 조수의 그림인가.”

법에서는 조영남보다는 조수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저작권 관련법에 따르면 위탁에 의한 창작품은 일반적으로 제작을 의뢰한 사람보다 실물로 표현한 사람에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법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고용인지, 위탁 관계인지도 살핀다. 고용 관계라면 조수가 주로 정기적인 급여를 받을 것이고, 비전문적 잡무를 돕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탁 관계라면 예술가가 기획자의 역할을 하고, 조수가 기술적인 부분을 도맡아 해주는 테크니션이다. 최종 결과물을 완성한 뒤에 보수를 받는다.

최종 창작물을 보면 사실 어디까지가 기획자의 아이디어고, 어디서부터 기술 표현의 영역인지 뚜렷하게 경계를 나누기 쉽지 않다. 전체적인 느낌에서 아이디어가 우선시되는지, 결과물의 미학적 호소력이 더 강한지 등 매우 자의적인 기준에 의거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오늘날처럼 ‘기획자로서의 예술가’가 늘고 있을 때는 ‘공동 저작자’란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만화스토리 작가가 구성을 짜서 시나리오와 같은 형태로 만화가에게 제공한 경우 공동 저작물에 해당한다. 작가와 만화가 모두가 창작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저작권과 관련해서는 실제로 만들고 표현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간주된다.

현대미술에서는 외적 표현보다 아이디어의 발상 쪽에 무게중심이 기울어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한 융합의 시대에는 아이디어에서 행위로, 기술력으로 연결되는 전체 과정이 아울러 고려돼야만 한다. 아이디어만으론 아무것도 남기는 게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화가 루벤스는 유명해진 뒤에 수도 없이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고, 제자와 조수가 섞인 상태로 공동 작업을 했다. 하지만 관행대로 루벤스의 이름으로 그림이 팔렸다. 그러나 최근 발간되는 루벤스의 도록에는 ‘루벤스와 그의 조수들’이 그렸다고 표기돼 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관행에 기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관행이란 단어를 굳이 써야 한다면, 오직 그것을 쇄신하고자 할 의도에서만 언급하면 좋겠다. 특히 예술가는 그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술가는 누구보다 새로운 시대가 오는 진동을, 그 변화가 주는 두근거림과 진통을 가장 빨리 감지해온 자들이 아니던가.

물론 조영남에게서 미래의 비전을 내다보는 대가다운 면모를 기대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화투 그림 화가’나 ‘달력 그림 화가’라고 불려도 개의치 않고, 작업 자체가 흥겨워서 하는 여유롭고 즐거운 예술인인가 했는데, 남에게 돈을 주고 그리게 했다니 안쓰럽게 들린다. 아무튼 이번 일을 계기로, 최종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누가 가지도록 할지 처음부터 법적 효력이 있는 계약서로 분명하게 해두는 것을 권하고 싶다.

새 시대가 오는 것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분야가 예술이라면, 가장 늦게까지 시대의 뒷정리를 감당해야 하는 분야도 있다. 그것이 법이다. 법은 사건이 터진 뒤에야 그 위엄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주은 < 건국대 교수·문화콘텐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