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유병규 산업연구원장 "구조조정은 타이밍이 중요…결과에 책임 물으면 누가 나서겠나"
해운 조선 등 공급 과잉 산업의 구조조정이 한국 경제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정부는 주채권 국책은행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대상 기업 간 이해 갈등과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둘러싼 관계기관 간 의견 차이로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이 많다. 민간연구소 출신으로 처음 국책연구기관장을 맡은 유병규 신임 산업연구원장(56·사진)은 “구조조정은 살아있는 생물체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로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며 “절차나 방법상 문제에 몰입하면 실기(失機)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유 원장을 만나 위기에 처한 한국 산업의 문제는 무엇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 등에 대해 의견을 들어봤다.

▷민간연구소 출신으로 국책연구기관장이 됐는데, 국책연구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유병규 산업연구원장은 “기업 구조조정은 살아있는 생물체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로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유병규 산업연구원장은 “기업 구조조정은 살아있는 생물체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로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그동안 국책연구소는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습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 등 주요 산업화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는 등 정부 정책 방향과 대안을 앞장서 제시해왔어요. 하지만 시대 변화에 맞춰 목표와 역할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전에는 주어진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면 됐지만 이제는 환경이 바뀌고 복잡해졌어요. 흔히 말하는 모방 추격형 경제에서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문제에 대답을 충실히 해주는 역할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역할과 기능을 바꿔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에 집중할 계획입니까.

“가장 중요한 게 ‘선제 연구’입니다. 문제가 닥쳐서 풀기 위한 대안 제시가 아니라 앞서 문제를 던지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의미에서 선제 연구가 중요합니다. 둘째는 ‘실사구시 연구’입니다. 과거 민간에 있을 때 국책연구소 보고서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라 현실 정책, 특히 정부의 정책 수요와 괴리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마지막으로 ‘비전 제시형 연구’가 중요합니다. 환경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국책연구소가 환경 변화를 앞서 진단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국책연구소 한 곳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요.

“맞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학제 간, 내외부 기관 간 융합연구가 절실합니다. 갈수록 경제현상은 복잡다기해져서 경제문제를 경제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여러 이해 당사자를 감안하고 경제 외적 현상까지 고려해 연구해야 합니다.”

▷한국 산업의 위기를 어떻게 진단합니까.

“197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한 주력산업이 기술적으로나 시장적으로 성숙화된 측면이 큽니다. 예전처럼 많은 수익을 내기 어려워졌다는 얘기죠. 중국 인도 같은 후발국 제조업이 따라와도 그들보다 한 단계 더 앞서갈 부가가치 창출력을 확보했어야 하는데 그것도 부족했어요.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새로운 일자리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신수종 산업 육성이 다급하고 절실한데 그 절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예컨대 신산업 육성에 필요한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말로는 부르짖지만 절박감, 절실함이 부족해요. 어찌 보면 한국 산업 발전의 가장 큰 제약 요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득권의 장벽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신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규제의 본질은 기존 질서 유지를 통해 이익을 누리는 집단의 지대추구행위입니다.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일하면서 경험한 일인데, 가령 서비스산업을 육성한다고 하면 그걸 통해 약간이라도 불이익을 받는 이해집단의 지대추구행위가 집요해요. 여기에 정치논리까지 개입하면 속수무책이죠. 이념의 장벽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가야 할 방향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반대하면 쉽지 않아요.”

▷신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까.

[월요인터뷰] 유병규 산업연구원장 "구조조정은 타이밍이 중요…결과에 책임 물으면 누가 나서겠나"
“과거에는 특정 업종에 정부가 과감히 지원하고 투자를 유도해 육성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어요. 참여자들이 시장의 경쟁원리에 따라 새로운 고수익을 내는 신수종 사업을 찾아가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역할에 주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상시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 있는 체계를 조성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시장 진입과 퇴출이 가능하도록 인수합병(M&A) 시장을 활성화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창업 생태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창업 생태계 측면에서 보면 한국과 중국의 산업 발전단계에는 큰 격차가 존재합니다. 중국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창업가 시대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한국은 과거 산업화 시대에 창업가 시대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지만, 지금 디지털 시대로 오면서 ‘수성(守城)의 시대’가 됐어요. 그만큼 창업 2, 3세들 사이에 기업가 정신, 창업가 정신이 위축돼있다는 얘깁니다. 창업가들이 디지털 시대를 이끄는 중국의 경제 발전 속도가 한국보다 훨씬 빠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요. 굉장히 위협적인 일입니다.”

▷한국이 창업의 시대로 다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릴 때부터 창업 정신을 심어주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초·중·고교 교과서를 보면 기업 혐오 정신만 가르치고 있어요. 중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4인 기준 국민소득이 8만달러이면 가구당 소득도 1억원 이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다들 손 들고 하는 얘기가 ‘대기업이 다 가져가서 그렇다’고 해요. 중·고교 사회 교과서가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생태계만 강조하고 있어요.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산업 구조조정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정부가 기업들을 모아놓고 ‘너는 이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더 이상 아니어서 많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조정 방향에 동의하더라도 기관별, 주체별 견해가 달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도 힘듭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살아있는 생물체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만큼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합의점만 있으면 ‘적기에’ ‘신속하고’ ‘충분히’ 재원을 투입한다는 원칙으로 속도감 있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절차상 문제에 몰입하면 실기할 가능성이 커요. 임진왜란 당시를 기록한 《징비록》을 보면 일본은 한 달 전부터 조선 침공을 준비했는데, 조정에서는 일본이 올 거냐, 안 올 거냐를 두고 명분 싸움만 벌였다고 합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정책 당국자들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당국자 입장에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살리는 게 맞는지, 죽이는 게 맞는지 확신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자칫 ‘수술’을 잘못 했다간 그 책임을 혼자 뒤집어쓸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보면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사후에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조조정 방향에 합의가 이뤄졌다면 사후에 문제가 되더라도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겠다고 제도적으로 약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갈수록 무역보호주의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통상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저성장 시대에는 자국 이익 추구 경향이 뚜렷해지게 마련입니다. 자연히 통상환경이 악화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우려되는 것은 비관세장벽입니다. 아무리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관세장벽을 낮춰도 비관세장벽이 높아지면 기업들이 현지에 진출하는 데 애로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의 통상정책도 비관세장벽 해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산업연구원도 국가별 비관세장벽이 어떤 게 있고, 어떻게 해소해나갈지에 초점을 맞춰 연구할 계획입니다.”

유병규 산업연구원장은…

1988년 현대경제연구원에 들어가 25년간 경제·산업 연구에 매진하며 동향분석실장과 경제연구본부장 등을 지낸 유명 이코노미스트다. 거시경제 흐름과 미시경제 전반에 정통해 경제와 산업 동향을 담당하는 기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이코노미스트로 꼽혔다. 성균관대에서 경제발전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 대통령 직속 헌법기구로 부활된 국민경제자문회의 실무총괄책임(지원단장)을 맡아 규제혁신, 서비스산업 육성, 지역 창조경제 활성화 등 박근혜 정부 주요 국정과제를 구체화하고 실현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지난 9일 민간연구소 출신으로는 처음 국책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장에 선임됐다.

△196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성균관대 경제학 박사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전략본부장, 경제연구본부장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 △한국경제학회 경제교육위원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원단장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지속발전분과장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