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기관 협의체 첫회의서 '국민부담 최소화' 원칙 확인
한은 역할론 공식화…다음 달까지 재원규모·조달방식 결론


4일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한 관계기관 간 첫 협의체 회의가 열리면서 구조조정 재원조달 방안과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일단 이날 첫 회의에서는 최근 현안에 관한 인식 공유가 있었을 뿐 구체적인 필요재원 규모나 조달 방법에 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재정 이외에 중앙은행이 가진 정책수단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해 한국은행의 역할론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다.

또한 국민 혈세로 귀결되는 국민 부담은 최소화하는 대신 구조조정 당사자의 엄정한 고통 분담과 국책은행의 철저한 자구계획 선행을 원칙으로 내세운 점도 의미 있는 성과로 꼽힌다.

◇ 조선업 구조조정 시나리오 따라 산은·수은 컨틴전시 플랜 수립

최상목 기재부 1차관 주재로 서울 청계천로 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금융시장 불안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선제적으로 대비한다는 의미는 향후 구조조정 진행상황에 따라 현재 국책은행의 건전성이 위험 상황에 도달할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현재 해운업 부실에 대비한 국책은행의 손실 흡수력은 충분한 상태이지만 앞으로 조선업 구조조정이 추가로 이루어질 경우엔 추가 손실 대응력이 필요할 것으로 시장은 보고 있다.

금융위는 향후 기업 구조조정이 국내외 경제 여건 변화에 따라 비관적, 중립적,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각각 상정해 국책은행 건전성 관리에 관한 비상계획(컨틴전시 플랜)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4일 언론사 부장단 간담회에서 "현상이 유지될 경우, 더 나빠질 경우, 낙관적일 경우에 대비해 국책은행에 어느 정도의 자본이 필요하겠다라는 계산을 가지고 있다"며 "다만 충분한 규모에 대해서는 부처간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국내외 경제상황에 따라 국책은행 자본확충 규모가 5조원에서 10조원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오늘은 산은과 수은의 경영 현황 보고를 듣고 앞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하자는 선에서 회의를 마쳤다"며 "자본확충과 관련한 구체적인 숫자가 거론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 한은 역할론 공식화…수은 출자·산은 코코본드 인수 방식 거론

이날 협의체는 한국은행이 기업 구조조정 재원 조달과 관련해 역할을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합의를 했다.

기재부는 이와 관련해 "재정과 중앙은행이 가진 다양한 정책 수단을 포괄적으로 검토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은행이 구조조정 재원 조달과 관련해 규모나 방식은 특정하지 않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것이란 점을 공식화한 것이다.

임종룡 위원장은 이날 부장단 간담회에서 "재정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중앙은행도 위기나 구조조정 시기마다 필요한 지원을 해왔다"며 "다행히 한은이 협력 의사를 밝혔고, 이와 관련한 논의를 오늘 시작한 것"이라고 밝혀 재원 마련을 두고 정부와 한은 간 공감대가 이미 어느 정도 형성돼 있었음을 시사했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지연하지 않고 신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의사결정 과정이 비교적 신속한 한은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정부와 한은이 우선 법 개정 필요없이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부터 사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 방안으론 정부의 현물(현금) 출자 또는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한 출자 등이 거론된다.

정부가 가진 공기업 주식을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에 현물로 출자하는 방식은 국회를 거치지 않고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집행할 수 있다.

한국전력이나 한국도로공사, LH 지분 등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현물출자와 아울러 내년도 예산안에 국책은행 현금출자 예산을 별도 편성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다.

한은의 역할도 현행법 테두리에서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수출입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한은이 추가 출자하는 방안도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만 거치면 된다.

산업은행 자본확충과 관련해서는 산은이 발행한 상각형 조건부 자본증권(코코본드)을 한은이 유통시장에서 매입하는 우회적인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코코본드는 일반 채권과는 달리 유사시 주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산은의 조건부 자본증권을 한국은행의 공개시장조작(공개시장운영)용 채권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산업은행에 직접 출자하려면 한국은행법이나 산업은행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 산은·수은 부실 책임론 부상…임종룡 "감사결과 나오면 책임 물을 것"

기재부는 이날 회의 후 "국책은행 자본확충은 재정 등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것이"이라며 "당사자의 엄정한 고통분담, 국책은행의 철저한 자구계획 선행 등 국민 부담 최소화를 원칙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당사자의 고통분담이란 부실기업의 주요 주주에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물어 충분한 자구노력을 선행적으로 요구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사재출연 등 대주주의 희생은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절차다.

눈에 띄는 부분은 국책은행의 철저한 자구계획을 선행해 요구한다는 점이다.

공적자금과 국책은행의 여신이 수조 원대로 들어간 대우조선해양의 부실 경영 책임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철저히 따지겠다는 의미다.

실제 산업은행 출신 인사들이 대우조선해양의 주요 임원 자리를 꿰차며 경영에 관여했지만 부실을 오히려 키웠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출입은행도 지난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게 돼 정부로부터 긴급 현물출자 수혈을 받아 간신히 10% 선을 넘겼지만, 1인당 직원 평균보수는 2014년보다 500만원 가까이 올랐다.

임 위원장은 이와 관련 "산은과 수은에 경영상의 책임을 묻는 게 필요하다"며 "감사원이 대대적인 감사를 이미 완료했고, 감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상응하는 관리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섭 이지헌 기자 p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