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해운동맹
12세기 독일에서 결성된 한자(Hansa)동맹은 400년 이상 북방 무역을 독점한 조직체였다. 한자의 상인들은 발틱해의 모든 해역을 자신의 통제 아래 뒀다. 전성기에는 가입도시가 200개나 됐다. 이들의 기반은 해운업이었다. 대형선박을 많이 거느리고 무역품을 실어나르면서 막대한 차익을 거둬들였다. 특히 이들은 선박공유제도를 유지했다. 동맹에 가입한 도시들은 대형선박을 이용해 무역을 하고 미지의 땅을 개척했다.

이들은 폐쇄적 카르텔 체제를 유지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외국인은 선박을 만들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었다. 선장도 되지 못했다. 이런 전통은 영국이나 다른 나라의 해상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해상 거래와 관련된 법들은 한자동맹의 관습에서 유래했다. 주식회사의 원형인 영국의 선박공유제 역시 한자동맹의 유산이었다.

해운동맹(Shipping Conference)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캘커타동맹도 한자동맹의 영향을 받았다. 1875년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에 물품을 실어나르는 영국의 선사(船社) 12개가 모여 결성한 것이 캘커타동맹이다. 1873년 영국의 불황으로 물동량이 없어 파산지경에 이르자 맺은 일종의 카르텔이었다. 해상화물의 운임이나 운송조건을 규정했다. 영국 정부도 적극 개입했다. 해운동맹은 이후 해로의 확장에 따라 갈수록 커져갔다. 하지만 해운시장의 변화도 나타났다. 정기선 해운이 컨테이너해운으로 바뀌었고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교역패턴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해운동맹의 독과점 여부가 부각됐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해운동맹 자체를 부정하면서 북미 항로의 운임을 자유화하기도 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에서도 해운동맹을 독점으로 보고 금지할 것인지 예외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2010년 이후 국제교역이 줄어들면서 찾아온 해운 불황은 해운동맹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선박의 심각한 공급과잉에 따른 치열한 운임 경쟁으로 선사들은 다시 해운동맹을 찾고 있다.

국내 양대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경영 위기에 빠져 해운동맹 재편과 이에 따른 해운시장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도 어제 해운동맹 재편 관련 대책회의를 열고 국내 경제에 대한 영향을 점검했다고 한다. 단기적으로 해운동맹에 적극 참여해 물동량을 확보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산업에서 상상할 수 없는 해운업계의 규칙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안타깝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