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저출산·고령화, 재정 거버넌스 강화해야 고비 넘는다
“재정의 역사를 알면 세계사의 천둥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한 말이다. 인류 역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이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로마의 멸망, 영국과 프랑스 민주주의 등장, 미국 독립전쟁, 2차 세계대전 발발 등 세계사에 획을 그은 사건은 여지없이 정부의 빚과 세금, 인플레이션 같은 재정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50년 넘게 지속한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미국 대학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의 ‘20세기 사건’이다. 그리고 슘페터의 말처럼 한국 경제 발전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빛나는 재정정책이 있었다.
[뉴스의 맥] 저출산·고령화, 재정 거버넌스 강화해야 고비 넘는다
1960년대 국세청 설립과 1970년대 부가가치세 도입 등은 당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제 투자 재원 확보를 뒷받침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세계를 휩쓴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의 어려움을 극복한 국가는 개발도상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 당시 한국보다 훨씬 부자 나라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지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은 중요한 고비에서 채택한 재정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일깨워준다.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개발해 추진한 중기재정계획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이 현재 개발도상국에 전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월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경제위기도 IMF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극복했다. 이 역시 충분히 쌓인 ‘실탄(낮은 국가부채)’을 바탕으로 시행한 적극적이고 과감한 재정정책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50년 가까이 고도성장한 한국은 최근 들어 성장잠재력이 급격히 둔화하고 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실질 경제성장률은 최소 3%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제는 2%대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는 세계 경제 상황이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는 세계를 휩쓴 매우 심각한 것이었지만 3~4년이면 극복할 수 있는 경기순환 과정의 하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촉발된 경제위기는 2010년 남유럽의 재정위기로 옮겨갔고 얼마 안 가 유럽의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중국 경제도 예전의 활력을 잃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세계 경제 상황으로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 경제의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실질경제성장률 2%대로 둔화

많은 경제학자는 현재의 글로벌 경기 침체가 세계의 성장 궤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한국은 적어도 미국, 유럽, 일본, 중국만큼 큰 타격을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8년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나 재정지표는 이들 국가보다 훨씬 양호하다. 한국은 2008년 이후 경제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국가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고령화로 인한 재정 어려움 가중

그러나 두 번째 요인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그것은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다. 이들 문제는 마치 당뇨병처럼 앞으로 한국 경제를 매우 오랜 기간 고통스럽게 짓누를 것이다.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속도와 그 심각성을 들여다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00년대 초반부터 1.25명 이하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일본(출산율 1.45명)보다 크게 낮다. 고령화 속도 역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현재 한국은 노인 비중이 13%로 미국이나 OECD 평균보다 젊다. 하지만 불과 15년 후인 2030년 그 비중은 24%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된다. 2060년 한국은 일본과 함께 노인 비중이 40%를 넘는 ‘가장 늙은 사회’가 될 것이다.

급격한 고령화로 인한 재정의 어려움은 이미 시작됐다. 작년 12월 정부는 2060년까지의 장기재정전망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고령화와 관련한 사회보험 분야 재정(국민연금, 의료보험 등)은 모두 지속 불가능하다. 한국 재정은 10년 후부터 사실상 세금인 사회보험 부담금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올려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은 이제 복잡한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저출산과 고령화 같은 본질적 문제가 상존해 사실 명쾌한 답은 없다. 그래도 25년 동안 거의 정체된 경제성장률을 보이면서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50%까지 커져버린 일본의 전철을 밟는 일은 피해야 한다.

고령화로 인한 재정 문제는 단기와 중장기에 걸쳐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나타난다. 당면한 재정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영유아 및 저소득 노인 등을 지원하는 사회서비스 복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의료보험 등 사회보험과 관련한 중장기 재정 부담 △각종 기금과 특별회계 등으로 흩어져 있는 재정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하는 의사결정의 주체가 필요하다.

한국이 지난 50년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요인 중 하나는 국가의 모든 재정을 총괄하고 중기 계획을 수립할 능력을 갖춘 경제기획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표현하면 정치권은 경제기획원이라는 재정당국에 강력한 위임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예산 과정에 나타나는 ‘공유지의 비극’을 차단할 수 있었다. 경제기획원을 바탕으로 재정 분야에 대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던 것은 한국이 수많은 다른 개도국과 큰 차이를 보인 대목이다.

21세기 한국은 성격은 다르지만 경제기획원을 설립하던 1960년대와 비슷한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미국의 ‘재정절벽’ 같은 사례에서 보듯 정치권 스스로 재정 문제를 잘 해결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다수당 연합정부가 100년 넘게 들어선 북유럽과 달리 양당제 국가 체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재정 거버넌스는 재정당국에 강력하고 총괄적인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재정 문제 통합 조정 필요

한국은 단기적이고 소모적인 복지 논쟁을 넘어 380조원에 달하는 국가재정이 나아갈 방향을 파악하고 복잡하게 분화돼 있는 재정 문제를 조율하는 권한과 책임을 지닌 ‘재정 거버넌스(재정정책을 결정하는 법과 행정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저부담·저복지’와 ‘저부담·고급여’ 간 조화 문제,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 간 중장기 조화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확립된 이후에만 풀 수 있는 난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처럼 리더십 부재로 현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현 상황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 한국의 재정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김정훈 <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재정연구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