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무릎꿇기
전쟁이나 전투에서 패자가 항복할 때는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든다. 저항이나 도주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릎은 대부분의 몸무게를 지탱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신체의 부자유를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어떤 굴욕도 감내하겠다는 체념의 의미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해야 했다.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무릎을 꿇어야 했으니 치욕적인 항복례였다.

무릎꿇기는 진심 어린 참회의 표현이기도 하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를 찾은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비가 내리는 속에서 유대인 추념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방문을 정치적 이벤트 정도로 폄하하던 폴란드인들도 이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로 불리게 된 이 사건에 당시 한 헝가리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고 평했다.

절대자 앞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으로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종교도 많다. 그런데 오래 무릎을 꿇는 것은 고통스럽고 특히 중년 이상에겐 건강에도 치명적이다. 그래서 미국에선 21세기 들어 가톨릭 미사 도중 신자들이 무릎 꿇는 행위를 놓고 찬반양론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레스토랑이나 항공사에선 손님과 눈높이를 맞춘다는 명분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기도 한다. 애완견이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으려고 애교 부리는 모양과 비슷하다 해서 ‘퍼피독(puppy dog) 서비스’라고 부른다.

한국 사회에서 무릎꿇기는 굴욕이란 의미가 너무 강하다. 체벌이 있던 학창시절 무릎을 꿇어봐서일까. 주차 아르바이트생이 잘못 안내했다고 무릎을 꿇려 사과를 받는가 하면, 학교를 찾아가 교사를 학생들 앞에서 무릎 꿇리는 학부모도 있다. ‘무릎 꿇고 빈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느껴질 정도니 양보와 이해를 찾기 어려운 팍팍한 사회다.

선거철이 되자 여야 정치인들이 무릎을 꿇는 사진이 연일 등장해 논란이다. 며칠 전 대구 두류공원에선 새누리당 후보들이 단체로 유권자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야당의 전 대표가 5·18 묘지에서 무릎 꿇고 묵념하는 사진도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어떤 후보들은 가마니를 깔고 100배, 500배 절을 한다. 스스로 비난을 달게 받겠다는 뜻이야 모르지 않지만, 효과에 대해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무릎꿇기는 진심이 생명이다. 하물며 선거철인데….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