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고령화 시대의 빛과 그림자
굳이 통계치를 제시하지 않아도 최근 들어 사람들이 무척 오래 살게 됐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데, 그런 측면에서 현대인 모두는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못 누린 대단한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불로초를 찾아 헤맨 진시황은 50세에 사망했는데, 이것도 당시의 보통사람들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오래 산 것이었다. 만약 신(神)이 있어, 죽음에 임박한 진시황에게 1년의 삶을 연장해 줄 테니 그 대신 천하를 반납하라 했다면 덥석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오래 산다는 것은 이처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노인들의 “아이고, 이젠 그만 살고 싶다”는 말은 알면서도 그냥 듣고 넘어가는 대표적인 거짓말 중 하나다.

진시황 시대의 인류는 기대수명이 25세 정도였다. 기대수명이란 갓 태어난 아기가 앞으로 살아갈 평균 햇수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100명의 아기가 태어나서 절반은 영아기에 사망하고 절반은 정확히 50세에 모두 세상을 떠난다면 이때의 기대수명은 25세가 된다. 이 정도 기대수명의 사회에선 나이 60, 즉 환갑이 되면 인생은 이미 한 바퀴 돌고 끝난 것이었다. 얼마나 희귀했으면 나이 70을 고희(古稀)라 불렀을까.

인간의 수명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삶이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 평균치를 보면 1900년까지도 겨우 31세던 기대수명은 1950년엔 48세로 늘어났고 2010년엔 68세에 이르렀다. 기대수명은 삶의 여건, 즉 1인당 국민소득과 상당히 비례해서 소득이 1000달러인 나라는 45세, 5000달러면 65세, 2만달러면 75세, 3만달러인 나라는 80세 정도다. 기대수명은 계속 늘고 있으며 선진국은 곧 120세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는 전문가들도 많은데, 지난해 미국 주간지 타임은 표지 기사로 기대수명 142세 시대를 다루기도 했다.

오래 사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함께하는 법이며, 우리 사회는 지난 반세기 짧은 기간에 소득 100달러에서 3만달러에 육박하는 기적적인 성장을 이뤘기에 그 그림자가 더욱 짙은 듯싶다. 장수(長壽)에 대한 준비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부족한데,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에 향년 103세로 세상을 떠나신 호서대 설립자 강석규 선생께서 95세에 쓰셨다는 일기는 큰 가르침이다.

“나는 65세 때 당당한 은퇴를 했지만 30년 후인 95세 생일 때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희망 없는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제 나는 어학공부를 시작합니다.”

무언가 의미 있는 노후를 보내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최근 일본 NHK가 다큐멘터리로 다룬 ‘노후파산(老後破産)’이다. 은퇴 후 안락한 삶을 꿈꾸며 성실하게 살았던 중산층 노인들의 비참한 현실은 큰 충격이며, 이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이를 직시하고 대비해야 한다.

아울러 미래 세대를 기르는 우리의 현행 대학 교육 체제에도 심각한 변화가 필요하다.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삶은 120세이며 결국 이들은 적어도 90세까지 사회활동을 할 것인데, 반세기 전과 동일한 단과대학과 전공학과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결국 미래에 중요한 것은 철학, 경영학, 기계공학 같은 한 개의 전공 능력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총체적 역량일 것이다. 대학은 이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김도연 < 포스텍 총장 dohyeonkim@postech.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