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보고 싶은 친구
누구에게나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 조언을 받았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조언이 삶의 향방을 바꾸게 했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필자에겐 현재 의사로서의 나를 있게 한 친구 K가 있었다. 1978년 대학 진학을 위해 재수하던 시절이었다. 학원 화장실에서 내 뒷목덜미를 후려치며 “너 나 몰라”하면서 씩 웃던 친구다. K는 사실 고등학생 시절엔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그저 문제아로만 기억된 친구였다.

이후 우리는 학원에서 공부하며 급격히 가까워져 많은 추억을 공유했다. 찬바람이 휑하게 불던 어느 날, 우리는 “예비고사(요즘의 대학수학능력시험 격)를 치르고 기쁜 마음으로 만나자” 약속하면서 서로를 격려했다.

아쉽게도 나는 또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K였다. 자존감이 강했던 K는 소아마비로 생긴 신체 불편 때문에 사춘기에 방황하고, 부모에게 반항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우리는 진솔하게 고민을 나눴다. 그러면서 K는 당시 문과계였던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대 진학을 권유했다. 평범했던 필자에게 큰 용기를 주면서….

이후 난 의대에 진학하게 됐다. 하지만 의예과 2년 재학 동안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내게 K는 친구 이상으로 공을 들였다. 매일 연락하고, 리포트를 대신 작성해주기도 하고, 여자친구를 소개하면서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준 것이다.

우린 각자 의사와 변호사가 돼 사회에 진출해 열심히 살았다. K는 만남의 횟수, 전화통화는 점차 줄었지만,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던 친구였다.

수년 전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잠든 어느 날 새벽녘, K는 ‘깜짝 전화’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고 싶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동안 고마웠다.” 곧 어디라도 떠날 사람 같았다. 다음 날 K는 “장난전화로 나를 놀렸던 재미가 쏠쏠하다”며 큰 소리로 껄껄거렸다.

그로부터 1년 후 K는 “폐에 혹이 있다”며 내게 연락을 해왔다. 폐암이었다. 투병 끝에 K는 세상과 작별했다. K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향하던 기차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오늘 K와 찍은 마지막 사진을 보면서 격한 그리움이 솟구쳤다. 생명이 움트는 이 봄, 소중한 친구 K와의 추억들을 되새겨본다.

윤호주 < 한양대 국제병원장 hjyoon@ha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