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유창혁 9단이 이전에 치른 경기를 복기(復棋)하고 있다. 유 9단은 “다시 한번 승부사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유창혁 9단이 이전에 치른 경기를 복기(復棋)하고 있다. 유 9단은 “다시 한번 승부사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조선 후기 ‘일지매’라는 의적(義賊)이 있었다고 한다. 고우영 화백(1938~2005)의 만화에도 나오듯이 일지매는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였지만 날래기가 귀신 같았다.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날아다녔다.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무술 실력을 바탕으로 탐관오리의 부정한 재물을 훔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프로바둑 기사 유창혁 9단(50·바둑국가대표팀 감독)은 전성기였던 1990년대 ‘반상의 일지매’로 불렸다. 호리호리한 체격, 하얀 얼굴에다 일지매처럼 빠르고 가벼우면서도 강한 바둑을 뒀다. 1993년 후지쓰배, 1996년 잉창치배, 2001년 춘란배, 2002년 LG배 등에서 우승하며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후 유 9단은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많은 바둑팬은 큰 세력을 쌓아 상대를 몰아치는 그의 공격적인 기풍(棋風)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2014년 바둑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로 변신했던 그가 지난 15일 ‘2016 전자랜드배 한국 바둑의 전설’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유 9단을 포함해 조훈현(63) 조치훈(60) 서봉수(63) 이창호(41) 등 시대를 풍미한 한국 바둑의 최고 스타 5명이 총출동해 풀리그 방식으로 실력을 겨룬 대회였다. 유 9단은 서 9단에게만 패했을 뿐 나머지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18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유 9단을 만났다. 그는 승부사로서 오랜만에 정상에 선 소감과 함께 바둑 지도자로서의 삶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영원한 라이벌 이창호에게 승리

한국기원 2층 계단 모퉁이에는 1993년 유 9단과 이창호 9단의 대국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유 9단은 일지매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바둑판을 쏘아보고 있다. 인터뷰 장소인 3층 사무실 문을 열고 나타난 유 9단은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푸근한 50대 아저씨였다. 그는 “젊었을 때는 마른 체형에 예민한 성격이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살이 찌고 바둑도 완만해지는 것 같다”며 웃었다. 대회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요즘 바둑 국가대표팀 감독, 바둑TV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승부감각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선배들과 대국을 하다 보니 가슴이 떨렸습니다. 조치훈 선배가 대국에서 지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복기하는 모습을 보고 ‘이분들은 아직도 승부의 세계에서 모든 걸 바둑에 쏟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둑을 갈고닦아 한번쯤 다시 승부사의 길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유 9단은 이창호 9단과의 첫 경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 승부로 꼽았다. ‘창과 방패’처럼 성격이 분명했던 두 기사의 승부는 1시간 동안 29수가 놓일 정도로 치열했다. 그는 “과거 이 9단에게 아프게 진 기억이 많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상대였다”며 “긴장했지만 재미있는 바둑을 뒀다”고 말했다. 바둑 전문가들은 아직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 9단의 우세를 점쳤지만 예상을 뒤엎고 유 9단이 이겼다.

유 9단은 전성기 때도 강자에게 더 강했다. 세계대회에서 고수들을 줄줄이 꺾었지만 국내 무명 기사에게 어이없이 패하는 경기도 유독 많았다. 한창 세계대회를 휩쓸던 시절에도 국내 승률은 60%를 겨우 넘겼다. 유 9단은 “큰 대회에서 흥이 나는 체질인 것 같다. 중요한 큰 시합에 모든 걸 쏟아붓고 작은 대국은 여가를 즐기듯 뒀다”며 “성공보다는 삶을 즐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유 9단은 젊은 시절 축구를 즐겨 했다. 대범하고 공격적인 기풍 때문에 ‘세계 최강의 공격수’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축구를 하면서도 항상 스트라이커만 맡았다고 한다. 그는 “급한 성격 탓인 것 같다”며 “젊었을 땐 바둑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공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일류기사 되려면 여행·독서 해야

유 9단은 2014년부터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현재 국내랭킹 1위인 박정환 9단을 비롯해 김지석 9단, 강동윤 9단 등 젊은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선수들에게 기술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에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국가대표쯤 되면 스스로 발전하는 수밖에 없어요. 바둑은 어느 정도까지는 배워서 실력이 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벽을 깨면서 실력을 키워야 하거든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정관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바둑만 두지 말고 여행도 다니고 인문학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다양하게 해보라고 조언합니다. 제가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데 학교 교육도 바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 교육은 공무원, 사무직을 기르기 위한 주입식 교육을 하기 때문에 범재는 많이 생길 수 있어도 천재가 나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한국 바둑은 중국에 밀리고 있다. 유 9단은 선배들에 비해 젊은 기사에게 부족한 점은 기술이 아니라 ‘절박함’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조치훈 9단은 평소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그만큼 절박하게 경기에 임한다”며 “일본, 중국에 비해 변방 취급을 받던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에 오르고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절박함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 9단은 “예전에는 고수에게 한 수 배우기가 쉽지 않았고 바둑책이나 자료도 구하기 힘들었다”며 “요즘엔 온갖 자료가 넘쳐나 바둑을 배우기 훨씬 좋은데도 예전처럼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덜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바둑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풍요롭기 때문인 것 같다”며 “일본이 가장 나태해져 있고 중국이 가장 절박하다. 한국은 그 중간쯤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바둑의 장점은 복기와 수읽기

최근 《미생》 《응답하라 1988》 등 TV드라마를 통해 바둑 배우기 바람이 불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는 “예전 드라마는 바둑의 세계를 엉터리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 드라마는 정말 고증을 잘한 것 같다”며 “아이들과 매회 빠짐없이 챙겨봤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돕고 싶다”고 말했다.

유 9단은 “바둑이 정말 좋은 점은 복기와 수읽기 때문”이라며 “과거의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고쳐가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의 깊이를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드라마 주인공 장그래와 최택이 똑똑하게 묘사되는 것처럼 실제로도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도장에서 바둑만 두다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해서 명문대에 가는 아이가 꽤 많다”며 “바둑을 한다고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유 9단은 “나이가 들면서 바둑처럼 인생에도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중국의 ‘영원한 기성(棋聖)’ 우칭위안이 ‘바둑이란 조화다’는 말을 남겼죠. 바둑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조화가 중요합니다. 세력에만 치우쳐도 안 되고 공격에만 몰두해도 안 됩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절대 고수가 될 수 없죠. 인생도 사회도 조화가 깨지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둑도장 갈 형편 안돼 신문 기보 오려 독학…특유의 기풍 만든 밑거름
가난도 막지 못한 '바둑 재능'

유창혁 9단은 어린 시절 가난과 싸워야 했다. 발명가였던 아버지의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어린 유창혁을 오래 가르칠 수 없었다. 끼니도 거를 만큼 가난해 기원이나 바둑 도장에 보낼 형편도 안됐다. 어머니는 신문에 실린 기보를 오려 아들에게 외우도록 했다.

젊은 시절의 유창혁
젊은 시절의 유창혁
독학으로 익힌 바둑이었지만 유창혁의 천재적 재능은 일찌감치 빛을 발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린이 국수전에서 3년 연속 우승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9년에는 학초배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쟁쟁한 성인 기사들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가난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알면서도 뒷바라지할 형편이 안됐다.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바둑보다는 학교 공부를 시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한창 재능이 솟아오를 시기인 중학교 3년을 허비한 것이다. 일류 프로기사들은 이 시기 대부분 학교에 다니지 않고 바둑에 매진했다.

유 9단은 “아마 그때 바둑을 계속했더라면 일본에 갔을 것”이라며 “다른 것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 바둑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진 않다”고 말했다. ‘바둑 명문’ 충암고에 입학하면서 다시 바둑판으로 돌아온 유 9단은 2년 만에 국가대표 선수가 돼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고 프로 기사로 성장했다.

이런 성장 과정에서 유 9단 특유의 기풍이 형성됐다. 두텁게 정석으로 죄어오는 이창호 9단과 달리 유 9단의 바둑은 경쾌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찌른다. 유 9단은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신문에서 오린 기보 하나를 오래 연구하면서 깊이를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