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매점매석으로 떼돈 번 허생, 그에게 시장 철학은 없었다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기록하며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랐지만 ‘분노사회’ ‘피로사회’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양극화와 청년실업 문제 등으로 소모적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시장의 철학》에서 ‘시장(市場)’이란 화두를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분열의 해결 방법을 모색한다. 시장을 철학적으로 성찰해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해부한다. 시장 철학은 단순히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모이는 장소’의 개념을 넘어 시민정신, 법치주의, 신뢰, 직업윤리까지 다양한 주제를 포괄한다.

저자는 먼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시장철학 논쟁의 실마리를 찾는다. 연암은 조선 문명의 성취와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연암은 허생전에서 허생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답답한 조선 세태에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과일과 말총머리 매입으로 허생이 이뤄낸 부의 증대는 오늘날로 보면 단순한 매점매석 행위에 불과했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돈을 못 갚으면 살을 내어준다는 자발적 상호 계약 사례를 보여줬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싹이 자라던 영국의 사회문화적 풍토를 우회적으로 알려준 것이다. 저자는 “근대 시장경제의 제도화 및 생활화와 결합한 사회적 신뢰의 부족이 현대 천민자본주의 행태를 낳았다”며 “이런 신뢰와 공공성의 부재가 한국 시장경제의 뿌리를 약하게 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는 복지 강화와 경제민주화에 대해 “시장질서와 민주질서의 균형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선 한국의 시장경제 시스템이 공정한 경쟁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이를 교정할 주된 해결 수단은 평등으로 대변되는 민주질서의 강화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시장에 대한 믿음이 절대화되는 게 심각한 편향인 것처럼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 다른 제도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또 다른 편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시장경제의 자원 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 배분은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공생 관계에 있는 경쟁자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시장질서와 민주질서의 균형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깨어 있는 성숙한 시민의 존재”라며 “시장과 민주주의 사이의 성찰적 균형 관계를 실행하는 집합적 실천은 우리 모두의 지혜와 헌신을 요구하는 미완의 행로”라고 강조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