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권 KIST 원장 "산업기술 밀알 역할 50년…양자컴퓨팅·나노신경 연구로 다음 50년 열 것"
“지난 50년은 당장 먹고살 기술을 개발하는 게 급했지만, 다음 반세기는 우리 사회와 산업에 필요한 연구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4일 설립 50주년을 맞는다. 이병권 KIST 원장(사진)은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66년까지 모토를 ‘Beyond MIRACLE(비욘드 미라클·기적을 넘어서)’로 정했다”고 말했다.

기적을 의미하는 ‘미라클’은 KIST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차세대 반도체(Material), 양자컴퓨팅과 나노 신경망(Information), 인공지능로봇(Robotics), 스마트팜과 천연물을 포함한 미래농업혁명(Agriculture), 신재생에너지와 에너지 네트워크(Carbon), 치매 진단과 바이오닉스(Life), 녹색도시 구현(Environment)에서 앞글자를 따왔다.

이 원장은 “에너지 문제와 고령화, 기후변화, 도시화는 앞으로 한국 사회에 큰 문제로 떠오를 것”이라며 “국가가 필요한 연구를 하는 종합과학연구소로서 미래 사회를 준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한국 산업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KIST가 맡은 중요한 역할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서 흘린 피의 대가로 설립된 KIST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한국의 산업 발전의 씨앗이 됐다. KIST가 지난 50년간 창출한 가치는 595조원을 넘는다. 포항제철소를 세우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밑그림을 그리고, 현대중공업이 조선소를 지은 것도 KIST 과학자들이 낸 아이디어였다. 국산 최초의 컴퓨터 세종 1호와 폴리에스테르 필름, 에어컨 냉매인 프레온가스를 대체한 불소화합물(HFC-132a) 등 한국 과학사를 빛낸 개발품을 쏟아내기도 했다.

1982년 KIST에 처음 입사하고 나서 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온 이 원장 역시 불소화합물 제조 공정 국산화에 참여한 일을 인생의 보람으로 꼽았다.

이 원장은 “KIST는 한국 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해야 할 때마다 조직을 바꾸며 유연하게 대처해왔다”며 “15년 전 국내에서 가장 먼저 뇌과학연구소를 세워 뇌 연구를 시작하고, 지난해 실리콘 기반 반도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포스트 실리콘’ 반도체 연구를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KIST는 뇌 연구에서 상당한 결실을 보았다. 지난 1일 일진그룹과 소량의 혈액만으로 치매를 조기 진단하는 신기술을 이전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순조롭게 개발이 이뤄지면 최대 3300억원의 기술이전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특히 올해부터 시작하는 양자컴퓨터와 나노신경망 모사 연구에 거는 기대도 크다. 이 원장은 “기업들이 3~4년 뒤 먹거리를 연구한다면 KIST는 10년 이후 먹거리를 연구해야 한다”며 “양자컴퓨팅과 나노신경망 모사는 선진국도 연구 초기 단계여서 열심히 하면 포스트 디지털 시대를 겨냥한 기술을 선진국보다 먼저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KIST는 오는 3월 중 각 대학과 기업 연구소에 흩어진 양자컴퓨팅 과학자들을 모은 연구 허브 조직을 출범시킬 계획이다. 이와 별도로 현재 로봇미디어연구소를 세계적인 로봇연구소인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카네기멜론대 로봇연구소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전문연구소로 키울 예정이다.

올해는 독일 자르브뤼켄에 KIST유럽연구소를 설립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KIST유럽연구소는 해외에서 독자적 연구를 수행하는 유일한 국책 연구기관이다. 이 원장은 “독일 등 유럽 국가는 히든챔피언(한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이 1~3위인 중소기업) 육성 경험이 풍부하다”며 “앞으로 기업들의 유럽 진출과 글로벌 히든챔피언 육성의 거점으로 KIST유럽연구소를 활용하겠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