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어떤 친중파의 중국 G1론을 듣고…
아마 오랜 약소국의 처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어를 하는 사람은 쉽게 친일파가 되고 중국어를 조금 한다 싶으면 금세 친중파가 되고 마는 것…. 어렵사리 중국어 좀 배웠는데 중국이 쪼그라든다면 그런 섭섭한 일도 없을 테다. 친중파가 급증하는 것은 한·중 교역이 급증해온 시류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싸구려 친중 논리가 국가 수준의 의사 결정에까지 침투 혹은 전염되는 경우다. 박근혜 정부의 친중노선을 둘러싼 논란은 그 결과들이어서 우려를 자아낸다. “아! 톈안먼 성루에 올라…” 식의 감상문이라면 이는 외교도 책략도 아니다. 꽤 이름이 알려진 모 국립대학 교수의 ‘중국 G1론(論)’을 들어야 했던 개인적 경험은 그런 면에서 참담한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관시(關係)의 나라다. 후진국일수록 지연 혈연 학연이 지배한다. 그에 반해 중국의 관시는 광역적 관계망이다. 열린 생태계여서 확장성이 크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그것은 기껏해야 친구들간의 우호 동맹을 벗어나지 못한다. “네가 내게 우의를 지키는 한 나도 너에게 이익을 보장한다”는 폐쇄적 의리 동맹이다. 인구가 많고 땅이 넓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결과다. 이 관시를 사회적 신뢰 시스템처럼 이야기한다면 소가 웃게 된다. 민주사회의 인간관계는 공개 경쟁의 관계망이다. 내밀한 집단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경쟁을 배제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개인들의 제도적 경쟁 관계로 발전해 가는 것이 바로 사회 진보다.

중국이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는 주장은 더욱 가관이다. 영국이 미국에 추월당하고도 수십년 동안 그것을 몰랐던 것처럼 지금 떠오르는 중국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주장도 많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듣는 데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미국의 부상은 신문명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증기가 전기로 교체되고, 수십명 공장이 수만명 공장으로 진화하고, 전기 전신 축음기 세탁기 냉장고 TV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심지어 지금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미제 아닌 것이 없는 오랜 누적의 결과다. 유럽의 거대한 지적 자산이 신대륙으로 이전되고, 그 결과 민주주의, 삼권분립, 여성해방, 노예해방, 민족자결, 인권의 정신적 가치들이 이 나라에서 우뚝 섰던 것이다. 그래서 가치와 지식의 거대한 대륙 간 이동이 촉발됐던 것이다(언젠가는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거대한 영토’라는 주장 역시 잘못된 기준이다. 오늘날도 세계의 스포츠와 문화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영국의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이 아니다. 골프에서 축구까지 스포츠의 대부분이 영국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은 산업혁명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영국에서 가장 먼저 태동했고 ‘건강한 육체’라는 관념이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정립됐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국토의 크기에 상관없이 한 나라의 국격을 끌어올리는 역사적 우월성의 목록표 중 하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러시아도 브라질도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지만 그 국민들은 지금 어떤 행복도 논하지 못하는 처지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양성에 주목한다는 주장도 있는 모양이다. 공산당의 인재는 공청에서 출발해서 지방 관리로 첫발을 떼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체제의 한계는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것이다. 잘해봤자 노멘클라투라 아니면 부패동맹을 만들어낸다. 정치국조차 집단지도일 뿐이어서 개인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논쟁할 가치가 없다. 인재 후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민주사회의 인재육성에 대해 그 무정부성에만 주목한대서야 이는 올바른 분석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시장이야말로 지식과 정보의 확산에 가장 적절한 체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친중 분자들의 고질병이다. 집단지도의 지도자는 개혁에 나서기 어렵다. 시진핑도 그럴 것이다.

중국 예찬론을 분석하는 데는 책이 몇 권이라도 모자란다. 무엇에 대해서든 예찬과 경멸이 과도해서도 곤란하다. 문제는 한국의 정향이다. 냉정한 분석이 있어야 판단도 바로 선다. 오류에 기반한 얄팍한 책략은 위험하다.

정재규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