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가 자산가의 재산을 대신 운용하다가 사후엔 계약에 따라 상속을 집행하는 ‘유언대용신탁’이 금융과 부동산을 융합한 틈새 상품으로 뜨고 있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본격적인 은퇴가 임박한 가운데 자식들의 상속 분쟁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수요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 상품의 등장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자산가들의 재산 중 부동산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높아 빌딩 임대차 관리, 리모델링, 중개 등의 부동산서비스 시장도 함께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상속 갈등 막는 데 적합”

70대 초반인 A씨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50억원대 빌딩을 자녀 세 명에게 증여하려다 보류했다. 재산을 물려준 뒤 자녀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생전에 자신이 임대료를 받고 사후엔 미리 정한 비율대로 금융회사가 상속인들에게 임대료를 나눠주는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지난해 맺었다. 장녀가 55세가 되면 건물을 팔아 나눠 갖도록 특약조항도 넣었다. 일종의 ‘불효 방지 신탁’인 것이다.

60대 후반인 B씨도 늦둥이 중학생 아들이 걱정돼 은행에 아파트(시가 15억원)와 현금성 자산(10억원)을 신탁했다. 부부 사망 시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매월 300만원의 생활비를 지급하다 성인이 되면 원하는 시기에 계약을 해지하도록 했다.

유언대용신탁은 금융과 부동산 자산관리에 상속을 결합한 고령화 상품이다. 국내에서는 2011년 신탁법 개정 전후로 상품이 출시됐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 말 누적 기준 KEB하나은행이 신탁계약 75건, 자산 규모 2500억원을 달성하면서 성장 잠재력이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급속한 고령화, 높아진 이혼율, 상속 분쟁 증가 등도 관련 시장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40~50대 문의도 급증

이 제도 도입 초기에는 본인이 치매를 앓거나 자녀가 정상적인 상속인이 되기 힘든 자산가가 주로 이용했다. 그러나 최근 40대 후반~50대 자산가의 상담 신청이 크게 늘고 있다.

배정식 전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2014년 대면상담이 154건이었는데 지난해 225건으로 늘었다”며 “계약자 평균 자산이 30억~40억원이지만 10억원 이하 고객도 있다”고 말했다. 상속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중장년층 수요자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복잡한 유언 절차를 피하면서 자신의 의사대로 금융회사(수탁자)가 상속을 집행하는 것도 관심이 높아진 요인으로 꼽힌다. 이혼한 사위나 며느리를 견제하면서 손주에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한 ‘조손(祖孫) 연속승계’ 요구도 커지고 있다고 은행 관계자들은 말했다.

오영표 신영증권 신탁부장은 “초기 단계지만 최근 고객이 먼저 문의해오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며 “작년 11월 말~12월 초 전국 영업직원을 대상으로 상품설명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부동산·법조계 미래 먹거리 기대

유언대용신탁이 부동산업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중소형 빌딩관리업체인 글로벌PMC의 김용남 대표는 “작년 8월 국민은행, 지난 12월 신한은행과 업무제휴를 맺었다”며 “임대관리업계에 새로운 고객 창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민호 지에이디건축설계사무소 대표는 “은행 내부 인력만으로는 수요자의 부동산을 맞춤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건축사무소나 시공·컨설팅·인테리어 업체 등과의 협력이 필요해 최근 미팅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김앤장 태평양 바른 충정 화우 등 법무법인과 법률사무소 등도 상속 자문을 위해 금융사와 업무제휴를 맺거나 자체 세미나를 열고 있다.

■ 유언대용신탁

遺言代用信託. 위탁자가 금융회사(수탁자)에 자산을 맡기고 운용수익을 받다가 사망 이후 미리 계약한 대로 자산을 상속·배분하는 계약. 법적으로 유언이 아니라 신탁으로 분류돼 유언이 갖춰야 할 엄격한 요건을 피하면서 재산을 자손들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물려줄 수 있다. 2011년 신탁법 개정으로 도입됐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