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한국 경제의 기적적 성장 비결을 젊은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청소년을 위한 공학 이야기》란 책을 썼다”고 말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한국 경제의 기적적 성장 비결을 젊은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청소년을 위한 공학 이야기》란 책을 썼다”고 말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고문·87)은 대통령이 ‘국보(國寶)’라고 칭했던 관료였다. 1970년대 후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 창원공업단지 시찰을 마친 뒤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연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기자들 앞으로 오 수석을 나오게 한 뒤 “오원철이는 국보야 국보”라고 치켜세웠다. 허허벌판이던 창원에 공단을 성공적으로 건설한 그의 공을 치하하려는 뜻이었다. 대통령의 이런 칭찬에 막중한 부담감을 느낀 그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효시이자 정부 주도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으로 꼽히는 오 전 수석이 최근 《청소년을 위한 공학 이야기》(한국경제신문 출판)란 책을 펴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한국형 산업혁명의 입안자인 그는 책에서 세계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청소년들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청소년에게 대한민국이 기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인 기술의 저력을 알려주고 싶다”며 기꺼이 인터뷰에 응한 그는 내년이면 미수(米壽·88세)다. 한 시간을 넘긴 인터뷰 내내 그는 꼿꼿이 등을 세우고 앉아 한국의 경제발전사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과거 자신이 작성한 도표와 자료를 꺼내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왜 공학을 책의 주제로 잡았습니까.

“사실 공학은 그냥 물건을 생산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물론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하는 힘을 가졌죠.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공학은 복합적이에요. 예를 들어 기계공학이 자동차나 배를 만드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거든요. 공장을 지으면서 입지를 생각하고, 교통과 물류를 파악하고, 고용과 환경을 검토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공학을 ‘시스템 엔지니어링’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시스템 엔지니어링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경제발전계획의 근간입니다.”

▷청소년을 위해 책을 쓴 이유가 궁금합니다.

“요즘 청소년은 정말 똑똑합니다. 많이 배웠고요. 하지만 취업하고 꿈을 펼쳐나가는 데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고도성장 시대가 마감되고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면서 기회가 많이 줄어든 탓이 클 겁니다. 하지만 한국은 정말 가난하고,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희망이 없던 나라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것은 과학기술의 힘을 키우면서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국의 발전 과정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책에 언급된 테크노크라트를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사실상 테크노크라트는 사라졌습니다. 시대적으로 테크노크라트가 소임을 다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이고 싱가포르 대만 등 우리 경쟁국들은 우리보다 더 잘사는데도 테크노크라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한국은 왜 그럴까요. 지도자들 자신이 다 안다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문 분야 사람들을 뽑아다 일을 맡겨야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지도자들이 모든 분야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있습니다.”

▷테크노크라트가 사라져서 어떤 문제가 있다고 봅니까.

“국가 발전 계획을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보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지금 한국의 경제 관련 법안이나 제도, 정책들을 보면 근시안적이고 단기적인 계획뿐입니다. 50년, 100년을 내다본 장기적인 계획과 종합적인 시각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관료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장기적인 계획이 없으니 계획의 구체성도 떨어지는 겁니다. ”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수석으로 일할 때는 그런 것이 가능했습니까.

“당시에는 기술자와 전문가들이 정책을 입안했습니다. 여기서 기술자와 전문가들의 공통점은 현장 경험입니다. 시발자동차 공장장이던 내가 관료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현장 경험을 중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 덕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처럼 책에 나온 내용을 달달 외워 시험 보는 방식으로는 뽑을 수 없어요. 현장 경험이 있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아는 기술자들이 모여서 국가발전계획을 짰기에 지금의 한국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국회의 힘이 너무 세져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관료들은 푸념합니다.

“핑계입니다. 예전이라고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국가라고 정부가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까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국가를 위하고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중차대(重且大)한 문제에 대해 원대한 계획을 갖고 국회를 설득해 봤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국회에 가서 몇 달이고 밤을 새워서라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야당도 설득할 수 있습니다. 가슴 뛰는 그런 국가 백년대계를 갖고 가질 않으니까 국회가 설득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민간의 힘이 커지면서 정부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민간의 힘이 아무리 커져도 정부에는 정부의 역할이 있습니다. 아직도 기업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제약이 많고, 국가가 할 일이 무궁무진합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찾는 노력이 별로 보이질 않습니다. 요즘 공무원들은 패기가 없어 보여요.”

▷국가장기계획을 세우기엔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국가는 50년 후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변화가 빠를수록, 계획과 목표가 있어야 변화에 대처할 힘이 생깁니다. 정말 지금 대한민국에 50년 후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엘리트가 있습니까. 현장을 모르는 사람, 하나만 아는 사람을 경제정책의 책임자로 삼으면 안 됩니다. 특히 정치인이 하면 더 어려워집니다. 국가의 50년, 100년 대계가 아닌 표(票)를 걱정하기 때문이죠.”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젊은이들은 이공계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이공계를 전공하면 출세를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겠지요. 요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중에는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지만 정부나 국회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 중에 공학을 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국가에서 공학 전공자들을 우대하고 이들을 발굴, 육성해 쓰질 않으니 젊은이들이 공학을 전공해서는 출세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공학을 경시하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는데 말이죠.”

[월요인터뷰] 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한강의 기적 근간은 공학…국가 미래 설계할 기술관료 중용해야"
오원철 前 경제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보'라고 칭찬

박정희 정부 시절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을 주도한 대표적 기술관료다.

황해도 풍천 출신인 오원철 전 경제수석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공군 기술장교후보생으로 입대, 소령으로 예편했다. 시발자동차 생산 회사의 공장장을 지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조사과장을 맡으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같은해 7월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임명돼 본격적인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상공부 공업제1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를 거쳐 1971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기술관료 중 박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한 인물로 꼽힌다. 대부분의 공업단지 건설을 입안했을 뿐만 아니라 철강 조선 원자력 석유화학 등 7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주도하고 방위산업도 키웠다. 1973년 ‘오일쇼크’ 때 중동 진출을 기획한 주역이었다. 1979년 12·12 직후 신군부의 눈 밖에 나면서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을 때까지 12년간 공식적인 대외활동을 하지 못했다.

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시절 한국의 경제개발 과정을 그린 ‘산업전략 군단사(軍團史)’를 한국경제신문에 연재해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1928년 황해도 풍천 출생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입학 △1951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57년 공군 소령 예편 △1957년 시발자동차 생산회사 공장장 △1961년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조사과장 △1970년 상공부 차관보 △1971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 △1974년 중화학공업기획단장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1998년~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