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동료 위해 한 몸 희생하리"…술고래 상사 전담 '자폭팀' 결성
한 대기업 지방 생산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김모 주임(29)은 지난 11월 초부터 간에 좋다는 민들레와 인진(사철쑥)을 달인 한약을 한 달째 복용하고 있다. 작년 송년회 시즌에 고생한 기억 때문이다. 김 주임은 입사 첫해인 작년 말 작업조 및 협력사와의 모임 등 20건 이상의 송년회에 참석했다. 그는 자기보다 20~30세 많은 생산직 선임자들과 술을 마시며 연말부터 연초까지 내내 술병을 앓았다. 이때 생긴 식도염으로 김 주임은 올해 내내 고생해야 했다.

송년회 시즌이 돌아왔다. 책상 앞 달력이 저녁 스케줄로 가득 찬 직장인이 많다. 해가 지날수록 송년회 분위기가 많이 차분해져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술이 빠진 송년회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연말을 맞아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는 직장인들에겐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몸이 상하는 걸 막기 위해 한 달 전부터 한약을 달여 먹고, 송년회 자리에서 끊임없이 술을 권하는 ‘밉상’ 상사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보기도 한다.

특명…“‘술고래’ 상사를 보내라”

한 섬유업체에 근무하는 김 대리(33)는 평소 소주 3~4병을 마시는 ‘주당’이다. 그는 3주 앞으로 다가온 부서 송년회를 앞두고 부서의 평화를 위해 ‘자폭팀’에 자원했다. 회사에서 소문난 술고래인 부서장 조 이사를 2차가 끝날 때까지 집으로 보내는 게 그에게 떨어진 특명이다.

부서 전체인원이 30~40명인 김 대리의 부서는 전 부서원이 모여서 술을 마실 일이 많지 않다. 송년회는 많지 않은 회식자리 중 하나다. 조 이사는 송년회 때만 되면 전 부서원들을 데리고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원들은 이번 송년회가 새벽 몇 시까지 이어질지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다. 그런 부원들을 위해 김 대리가 1차 회식장소인 고깃집에서 조 이사를 집중 마크하기로 했다.

벌써 부원들과 작전까지 다 짜뒀다. 김 대리가 조 이사를 주로 상대하고, 여자 직원들이 옆에서 폭탄주를 계속 권하는 방식이다. 김 대리는 “다른 회사는 와인도 마시고 영화도 본다는데 우리 회사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어쨌든 평화로운 송년회를 위해서는 내가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대기업에 다니는 박 대리(32)도 송년회 시즌을 맞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는 입사 후 12월만 되면 학연, 지연, 부서, 업무 파트너별로 잡히는 사내 송년회에 참석하느라 한 달 중 절반가량을 술독에 빠져 지내는 생활을 반복해왔다. 회사 안팎에서는 “퇴사할 일이 있으면 송년회 시즌 전에 하는 게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불참금지는 기본이다. “‘마셨다 하면 원샷’, ‘상사의 일장연설’, ‘진상 상사의 술주정’ 등 술자리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안 좋은 일들을 송년회에 몰아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게 박 대리의 설명이다.

송년회가 몰려 있는 12월 둘째 주를 지나고 나면 술을 즐기는 편인 그도 회사가 지긋지긋해질 정도다. 친구들로부터 “송년회에 참석하라”는 제안이 종종 들어오지만 시도 때도 없이 사내 송년회가 잡혀 쉽게 ‘OK’를 할 수도 없다. 그나마 요즘 실적부진으로 사내 분위기가 침체돼 있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과거처럼 마냥 붓고 마시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박 대리는 편한 사람들과 오붓하게 즐기며 마시는 술자리가 그립다.

가족동반 송년회가 괴로운 직장인들

한 대기업 인사팀에 근무하는 최 과장(39)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회사 송년회에 참석할지 말지 고민 중이다. 그가 속한 부서는 최근 몇 년간 가족과 함께하는 송년회를 열고 있다. 올해 송년회도 부인, 아이들과 함께하기로 계획돼 있다.

문제는 그가 3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 과장은 자식들 교육을 위해 부인과 두 딸을 뉴질랜드로 보내고 3년째 혼자 살고 있다. “회사 송년회 때 단란한 동료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추운 날씨만큼이나 가슴이 시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작년에는 한 동료의 자녀가 “아빠, 왜 저 아저씨는 혼자 왔어”라고 물어보는데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아직 최종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송년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회사에는 휴가를 내고 “애들 보러 뉴질랜드에 다녀오겠다”고 둘러댈 생각이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 과장(39)은 팀원들 몰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송년회’를 계획하고 있다. 매년 술과 고기로 채우는 송년회에서 벗어나 가족이나 애인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김 과장의 계획은 이렇다. 먼저 팀원들에게 영화티켓을 두 장씩 준다. 같은 영화관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상영되는 영화티켓이다. 영화티켓뿐 아니라 이날 사용할 수 있는 영화관 주변 패밀리레스토랑 이용권도 준다.

김 과장의 계획이 착착 실현되면 팀원들은 송년회 날 영화관과 레스토랑에 친구나 연인, 가족을 데려올 것이다. ‘팀원들은 송년회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상당수 팀원들은 이미 김 과장의 계획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고 상당히 우려하는 팀원들이 많다. 김 과장의 한 동료는 “팀원 중에 주변에 알리지 않고 교내에서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 “애인을 데리고 동료들 앞에 나서면 상당히 난감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송년회라니…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대리(33)는 요즘 회사 이 부장이 원망스럽다. 이 부장이 부서 송년회 날짜를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로 잡아버린 것. 김 대리는 지난 10월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여자와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만나고 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여자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송년회 날짜가 24일로 잡히면서 이런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다른 부서원들도 이 부장이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가족, 애인, 친구 등과 각자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 계획을 짜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직접 나서서 이 부장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독불장군’ 이 부장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직장생활이 피곤해질 수 있어서다.

“5년째 ‘솔로’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여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회사에서 기회를 안 주네요. 부서장 잘못 만난 내 신세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