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내가 망해도 꼭 해야 할 일…후대 디딤돌 된다면 보람"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호 峨山·아산)이 타계했을 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誌)는 ‘아산은 많은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 평가대로 아산은 대부분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역사를 현실로 만들어냈다.

한국은 연간 450만대를 생산하는 세계 5위의 자동차 대국이다. 하지만 아산이 자동차사업을 시작한 1968년만 해도 국내에 등록한 자동차가 3만여대에 불과할 정도로 제대로 된 산업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산은 ‘자동차 독자 개발’을 선언했다. 미국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동원해 아산을 말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립 경영’을 관철했다.

아산은 “자동차산업이 없으면 진정한 산업화를 할 수 없다. 내 일생 벌어놓은 것을 다 투입하고 망하더라도 꼭 해야 한다. 내가 놓은 디딤돌을 밟고 후대의 누군가가 성공하면 나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겠다”고 주위를 설득했다. 아산의 자동차 독자 개발은 농업 중심이던 한국의 산업구조를 공업으로 바꿔 오늘날 제조업 강국이 되는 씨앗이 됐다.

건설업에 토대를 둔 아산은 공기(工期) 단축, 즉 ‘일의 속도’에 경영의 중점을 뒀다. 그는 이익을 남겨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진정한 기업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공사나 생산 일정을 단축하는 것이야말로 이익을 창출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것이 아산의 ‘속도 경영’이었다.

1968년 3월 첫 삽을 떠서 2년여 만인 1970년 6월 마무리지은 경부고속도로는 아산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조선소를 지으면서 선박을 동시에 건조한다는 발상을 통해 1972년 3월 조선소 착공, 1974년 6월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세계 조선사에 유례없는 기록도 세웠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역(逆)발상 경영’ 또한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산은 오히려 ‘지금 가장 돈이 많은 중동에 진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등 대형 공사를 수주하며 외환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경제를 지켜내는 데에도 기여했다. 1984년 대형 폐유조선을 이용해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에 성공한 ‘정주영 공법’도 빼놓을 수 없는 역발상 경영 사례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