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G "회사 분할 검토"…행동주의 투자자에 백기 드는 글로벌 기업들
미국의 최대 보험회사 AIG가 모기지(주택담보대출)보험사업부를 분사하거나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30일 보도했다. 전날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이 AIG를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모기지보험 등 3개로 쪼갤 것을 요구한 지 하루 만에 나온 결정이다. 아이칸은 피터 핸콕 최고경영자(CEO)에게 보낸 서한에서 비용절감과 사업구조 효율화를 위해 회사를 즉각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세지는 행동주의 투자자 요구

AIG를 하루 만에 굴복시킨 것처럼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이 갈수록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조만간 입찰이 이뤄지는 세계적 호텔체인 스타우드의 매각도 행동주의 투자자 존 폴슨의 압박에 의한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폴슨은 자신이 이끄는 헤지펀드 폴슨앤드코를 통해 쉐라톤과 W호텔 체인 모회사 스타우드의 지분 7%를 확보해 회사를 분리하거나 매각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20일 KFC 피자헛 타코벨 등 유명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거느린 얌브랜즈가 중국사업부를 떼내 별도 회사를 세우기로 한 것도 키스 마이스터 코벡스매니지먼트 설립자의 요구가 관철된 사례다. 중국사업부 분리 결정은 얌브랜즈의 지분 5%를 갖고 있는 마이스터가 최근 등기임원이 된 뒤 전격 이뤄졌다.

세계 최대 모바일칩 제조사인 퀄컴이 지난 7월 라이선스사업부 분사와 비용절감, 자사주 매입 등을 검토하기로 한 것도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자나파트너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라고 WSJ는 전했다.

최근 미국의 대표적 제조회사 제너럴일렉트릭(GE)까지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잠재적 공격 대상에 올랐다. 미국 최대 화학업체인 듀폰을 공격한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가 GE에 25억달러를 투자해 지분 1%를 보유하면서 10대 주주가 됐다.

FT는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를 이끄는 행동주의 투자자 넬슨 펠츠가 GE에 자사주 매입 확대와 인수합병(M&A)을 요구할 것이라며, 경영진이 상당한 압박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펠츠는 듀폰의 사업부 분리와 이사회 참여를 요구하며 올해 정기주총에서 위임장 대결까지 벌였다. 요구를 관철시키진 못했지만 엘런 쿨먼 듀폰 회장 겸 CEO는 펠츠가 비판한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 밖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반대를 주장했던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스토리지 세계 1위 기업 EMC에 자회사 분할을 요구했고, 네트워크 장비업체 주니퍼네트웍스엔 비용 절감 및 인력 감축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뜨거워지는 행동주의 투자 찬반 논란

행동주의는 지배구조가 좋지 않거나 경영상의 비효율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투자해 일정 지분을 확보한 뒤 기업분할이나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을 압박, 단기간에 주가를 끌어올려 수익을 챙기는 투자 행태를 뜻한다.

과거에는 덩치가 작은 회사가 타깃이었으나 글로벌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글로벌 기업까지 먹잇감이 되고 있다.

월가의 한 관계자는 “최근 증시 침체로 수익률 하락에 시달리는 헤지펀드가 단기간 내 투자효과를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며 “일부 주주도 주가상승으로 이어지는 행동주의 투자자의 공격에 동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AIG는 아이칸의 회사분리 요구 소식이 전해진 당일 주가가 5% 급등했고, 얌브랜즈도 중국사업부 분리를 발표한 날 2% 올랐다.

하지만 주주가치 확대를 명분으로 내건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이 기업의 성장 기반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CEO가 장기성장 전략을 마련하기보다 단기적 주가 관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5월 아이칸을 겨냥해 “단기투자를 일삼는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면서 기업에 자사주 매입을 강요하는 등 기업의 장기 이익에 반하는 요구를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S&P500지수에 편입된 상장회사의 15% 이상이 2009년 이후 행동주의 투자자로부터 회사 경영진 교체나 구조조정 시행 요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