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Biz] 법원전산화, 여전히 '거북이걸음'
법원이나 검찰청에 가면 수레에 서류를 잔뜩 넣어 끌고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수사기록 등 재판 관련 서류를 검찰청 법원 등으로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이다. 바깥 사회에서는 전자문서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일상화됐지만 법조계는 아직 아날로그적인 업무처리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조서나 증거 같은 건 위조 위험이 작은 하드카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보안을 중요시하는 금융회사들도 오래전에 대부분의 거래를 전자화했다. “기업의 변화 속도가 시속 100마일이라면 법은 1마일로 움직인다”는 말이 와닿는다.

법조계의 이런 느린 시대 적응을 볼 수 있는 일이 최근 하나 더 생겼다. 대법원은 “어떻게 하면 국제 특허분쟁을 많이 맡을 수 있을지”를 연구하기 위해 민간 전문가 등을 모아 지난 6월 ‘지식재산권(IP) 허브코트 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추진위는 다음달 최종 결과를 내놓을 방침이다.

앞서 중간 의결한 사항을 보면 영어 재판부 설치 등 긍정적인 방안도 많다. 그러나 더 중요한 소장 전자 제출(이파일링) 도입은 추진위에서 의결하지 못했다. 애초 이 안건은 추진위의 논의 사항에 포함됐지만 부작용 우려 때문에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소장 전자 제출이 일반화된 지 오래다. 변호사가 컴퓨터로 소장을 작성한 뒤 이메일 보내듯이 컴퓨터에서 바로 법원에 제출할 수 있다. 사법절차의 효율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 미국변호사는 “모든 게 다 전자화된 요즘 소장 전자 제출은 미국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라며 “점점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국제중재에서도 서류 제출을 대부분 전산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 법원도 종이 문서로 하는 걸 최대한 줄이고 이런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독일변호사는 “독일에서는 법원에 제출하는 증거자료를 사본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며 “소장 전자 제출 시스템 도입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재판업무의 전자화 수준은 소송 당사자의 편의와 큰 관련이 있다. 이대로라면 외국 소송 당사자가 한국 특허법원의 글로벌재판부에 사건을 맡기기 위해 대전(특허법원 소재지)에 직접 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소장 전자 제출을 도입해 한국에 오지 않고도 한국 특허법원에 소장을 낼 수 있게 되면 특허법원의 국제적 위상을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IP 허브코트를 조성하고 싶다면 이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양병훈 법조팀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