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없는 조정안
열정이 직업이 될 수는 없다. 사랑이 직업이 되는 경우도 그렇다.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된 열정과 사랑은 종종 역겨운 결말로 이어진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장 노동의 대가가 아닌 금전상 수입은 부패와 뇌물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열정과 사랑이 돈으로 치환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국회의원에까지 오른 민주화 운동가들이 거듭 무언가의 현금 보상을 받는 것에서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백혈병을 비롯한 몇 가지 치명적 질병이 생길 수 있다는 개연성은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사망자 유족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이 장기간에 걸쳐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딱한 일이었다. 반올림이라는 시민단체가 나서서 피해자 가족을 도와 삼성전자와 이 문제를 다투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왜 이런 문제가 산재에 관한 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프로세스로 해결되지 않는지를 의아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실망에 빠진 피해자들을 지원해 거대 조직인 기업과 대화를 끌고 간다는 것은 운동가적 희생과 열정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가들이 과잉된 직업의식을 갖게 되면 운동은 궤도에서 이탈하고 만다. 피해자 가족들이 조력자의 진의를 의심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다. 전직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이라는 것이 의혹을 키우고 의심을 부풀렸다. 삼성전자와 피해자 가족을 중재한 것이 아니라 투쟁가들을 위한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괴이쩍은 조정안을 내놨다. ‘산재투쟁을 구조화, 상설화하기 위한 중장기 투쟁방안’을 내놓은 꼴이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결국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자기 돈으로 자신을 감시하는 조직을 창설하라는 우스꽝스런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정위원회는 놀랍게도 ‘세계적 기준과 제도’(?) 만들기를 시도하였고 처음부터 “이번 교섭의 결과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등으로 과업을 과대포장했다. 무려 1000억원을 출연해 공익법인을 만들라는 것은 누가 봐도 생소하다. 피해자 가족도 이 공익법인을 통해서 비로소 보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익법인에는 사무국을 두고 상근 임직원을 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삼성전자를 감시할 3명의 옴부즈만을 두고 상임·비상임 연구원과 7명의 이사를 두라는 요구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운동가들의 직장은 만들어졌다. 열정은 직업으로 둔갑하였다. 조정위는 놀랍게도 공익법인의 발기인에게까지 보수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옴부즈만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공익법인이 위촉하는 3명 이상의 옴부즈만은 삼성전자의 재해관리 시스템과 산업안전보건 관리현황 등 필요한 모든 정보를 회사로부터 제출받아 시정을 권고하거나 의견을 제시하고 보고서를 발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맙소사! 삼성을 상시적으로 감시감독하게 될 법인이 삼성의 돈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출연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걸이거나 아니면 강탈이 되고말 운명을 이 공익법인은 타고 났다. 1000억원 중 법인 운영자금은 300억원이지만 돈이 떨어지면 삼성과 반도체 협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조정안이 받아들여지면 운동가들의 공익법인은 성능 좋은 현금인출기 하나를 확보하게 되는 꼴이다. 기업의 돈은, 이렇게 누구라도 가져다 쓰면 그만인 공동의 호주머니라는 것인지.

조정안은 백혈병 피해구제가 아니라 항구적인 반(反)삼성 운동조직을 만들려는 기획안처럼 보인다. 그렇게 조정이라는 이름의 신뢰구조는 무너졌다. 신뢰만도 아니다. 산재보상에 대한 법적 절차도, 직업병에 대한 과학적 탐구도, 법치주의도 사라졌다. 혹 이런 조정안이 시민운동 단체들에는 이미 하나의 사업 모델로 정형화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세월호조사위도 유사한 의심을 받고 있다. 항구적 일자리를 만들어내자는 새로운 전략인 것인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