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 히데키 교수 "왕이 주도한 '지의 혁명'…한글은 언어학의 총체"
“세종과 최만리가 조정에서 한글을 두고 벌이는 토론을 보면 정말 흥미진진해요. 왕궁에서 언어를 주제로 아주 넓고 깊은 사상투쟁이 있었던 것이니까요.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앎의 새 지평을 연 혁명입니다.”

한글과 한국어 연구 전문가로 유명한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 메이지가쿠인대 객원교수(사진)는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한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일본인이란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누가 들어도 한국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한다고 착각할 정도로 한국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그는 “한글은 그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표음문자’와 같은 형용으로 칭찬받고 홍보할 대상이 아니다”며 “문자가 없던 세계에서 문자가 생겨나면서 문화와 앎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더욱 입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마 교수가 한글 및 한국어와 만난 인연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원래 전위미술가였다. 개인전을 여덟 번 열고, 1977년 현대일본미술전에 입상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직업이 훗날 예술가에서 언어학자로 바뀌게 되리라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0대 중반 우연히 한국어와 한글을 접했다. 음을 분석해 문자라는 형태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한자 중심의 지식 체계를 완전히 뒤엎은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를 알게 됐다. 한글과 한국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언어학 공부를 시작했다. “1970년대엔 일본에 한국어 교재가 많지 않았어요. 일본 언어학자가 내놓은 교재 중에 한국 기독교방송 아나운서들이 녹음해서 만든 테이프가 있었죠. 카세트테이프는 많이 들으면 늘어져 망가지기 때문에 아예 여러 개씩 복사해서 몇 시간씩 듣고 따라하길 반복했어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발음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었다. 노마 교수는 “처음엔 ‘ㅈ’과 ‘ㅊ’ ‘ㅉ’ 발음을 잘 구별하지 못해 연습하는 데 애를 먹었다”며 “일본어에선 모음 ‘오’와 ‘어’ 발음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이 발음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또 “마음 같아선 한국에 직접 유학 가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공부할 당시 그럴 형편이 못 됐다”며 “교재를 통해 존댓말로만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들이 반말하는 걸 듣고 매우 놀랐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후 도쿄외국어대 교수가 되고 1996년부터 10개월 동안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있었다. 본격적으로 한글과 한국어 연구에 매진한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 간 대조언어학, 한국어 교육, 음운론과 어휘론, 문법론, 언어존재론 등이 주요 분야다.

‘한국어 어휘와 문법의 상관구조’ ‘절묘한 한글’ ‘한국어를 어떻게 배울 것인가’ 등 여러 한국어 관련 저서를 썼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과 의의를 다룬 ‘한글의 탄생’은 2010년 일본에서 일본어판으로 먼저 출간돼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아시아조사회가 주최하는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받았다. 이듬해엔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뒤 지난 3월 13쇄째 출간되며 인기 스테디셀러가 됐다.

노마 교수는 “최근 한국과 일본 간 외교관계가 경색됐다고는 하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양국 정부 간 일이고, 민간 차원에선 언어교육이나 학습을 비롯해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며 “한글 창제와 발전의 정신을 본받아 이성적이고 진지하며 따뜻한 만남을 지속적으로 거듭해 나가면 우리 앞에 있는 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