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이병철·정주영…거인들이 안보인다
삼성그룹이 반도체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74년이다. 그후 64K D램이라는 그럴듯한 반도체를 개발한 것은 1983년이다. 꼬박 9년이 걸렸다. 현대자동차가 1967년 자동차 조립 사업을 시작한 뒤 최초로 국산 완성차인 포니를 생산한 것도 9년 만인 1976년의 일이다. 9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창업주들의 집념 덕분이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도전 정신이 한국 전자·자동차산업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최근엔 이런 성공담을 듣기 어렵다. 힘든 창업보다 편한 취업을 선택하는 젊은이가 늘고 창업하더라도 당장 밥벌이에 급급한 생계형 창업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창업주
삼성그룹 창업주
생계형 창업만 하는 한국

한동안 식었던 국내 창업 열기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작년 신설법인 수는 8만4697개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종전 기록이었던 2013년 7만5578개보다 12% 늘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국가별 생계형 창업 비중을 집계한 결과 한국이 1위였다. 한국의 지난해 창업 유형 중 생계형 창업 비중은 63%로 조사 대상 29개국 중 가장 높았다. 혁신 등이 필요한 기회추구형 창업 비중은 21%로 최하위였다.

기회추구형 창업이 줄면서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도 사그라들고 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 500대 기업 명단의 변화는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10년 동안 새로 500대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린 순수 창업회사는 46개였다. 창업한 지 20년이 안 된 회사는 14개였다. 14개의 신규 기업 중 신기술과 신사업을 바탕으로 한 혁신형 기업은 네이버와 넥슨 정도밖에 없었다.

최성호 경기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도전과 모험 정신이 가장 왕성해야 할 청년층이 식당 같은 일반서비스 창업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며 “성장 가능성이 크고 경제 선순환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형 창업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그룹 창업주
현대그룹 창업주
역동적인 미국과 중국

한국과 달리 해외에선 혁신형 창업이 활발하다. 미국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46%가 지난 10년간 교체됐다. 이 기간에 미국 50대 기업 중 66%가 종적을 감췄다. 애플과 아마존, 구글, 테슬라 같은 젊은 기업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도전의 아이콘’이 넘쳐나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 신규 등록한 업체 수는 총 1292만개로 2013년보다 14.2% 증가했다. 최용민 한국무역협회 베이징지부장은 “중국 내 모바일·인터넷 사용인구가 5억명이 넘을 정도로 전자상거래가 급증하고 해외에서 유학생과 외국 자본이 동시에 유입되면서 창업 저변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며 “정부가 행정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점도 창업 열기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혁신성 측면에서도 한국은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새로운 혁신기업을 세워 더 멀리 도망가고 중국 등 개발도상국은 기술 개발을 통해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제자리걸음이다. 대기업들은 10년 넘게 신성장동력 발굴을 외치고 있지만 뚜렷한 미래 사업을 찾지 못하며 수년째 똑같은 메뉴를 반복하고 있다. 벤처기업들은 혁신보다는 원가 절감을 통해 단기 이익을 늘리는 데 집착하고 있다.

정준 벤처기업협회장은 “대기업은 안전한 사업만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벤처기업은 혁신성을 잃고 있다”며 “국가 전체적으로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