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9개월째 0%대를 기록해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진다. 디플레이션 우려는 한국은행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에 관한 한 일본도 상황은 비슷하다. 불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물가가 하락하자 일본 내외의 경제분석가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디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이들은 대개 인플레이션도 나쁜 것으로 여긴다.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둘 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근본적인 의문은 지금의 국내 경제 상황을 과연 디플레이션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다.

국내 물가상승률 0%대…디플레 국면이라고? 인플레 환경 속 민간 현금보유 늘어난 결과일 뿐
먼저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의 정의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디플레이션이란 통화 공급량이 감소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통화 공급량이 증가하는 것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오늘날 케인스 추종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일반인은 ‘전반적인 물가 하락’을 디플레이션으로 정의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물가 상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틀리기는 마찬가지다.

물가 하락(상승)은 통화 공급량 감소(증대) 때문일 수 있고 다른 원인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물가 하락(상승)은 결과이지 그 자체가 디플레이션(인플레이션)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가 하락(상승)을 디플레이션(인플레이션)으로 정의하는 것은 디플레이션(인플레이션)의 원인을 모호하게 해 그 해결을 어렵게 한다.

재화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일곱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가격에 대한 기대, 개별 재화의 수요·공급 등과 같은 것은 비화폐적 요인이고 바로 그 이유로 여기에서는 제외한다. 디플레이션은 화폐와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폐와 모든 재화의 가격은 어떻게 연관돼 있는가(염두에 둬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총량적 개념, 즉 방법론적으로 모든 재화를 하나의 재화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모든 재화 가격을 결정하는 궁극적 요인은 네 가지다. 화폐 재고, 재화에 대한 예비적 수요, 재화 재고, 화폐에 대한 예비적 수요 등이다. 앞의 두 요인은 각각이 증가하면 모든 재화 가격을 상승하게 한다. 뒤의 두 요인은 각각이 증가하면 모든 재화 가격을 하락하게 한다. 예를 들어 화폐에 대한 예비 수요, 즉 현금 수요가 증가하면 그만큼 모든 재화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기 때문에 모든 재화 가격은 하락한다. 종합하면 최근 낮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소위 디플레이션)은 앞에서 열거한 네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 결과다.

이 네 가지 요인의 최근 변화를 살펴보자. 첫째, 일정 시점의 화폐 재고는 일정하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정책과 민간 은행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화폐 재고가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 지난 60여년을 일별하면 한국은 일시적으로 화폐 재고가 감소한 경우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화폐 재고는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일부 예외적인 시기를 제외하면 언제나 인플레이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도 통화 공급은 증가했다.

둘째, 모든 재화에 대한 예비적 수요는 장기적으로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투기가 재화에 대한 예비적 수요의 주요 이유이기 때문에 재화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국내에서는 부동산, 농수산물을 포함한 원자재 등과 같은 일부 재화는 투기가 상당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단기간 물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셋째, 자본투자가 축적됨에 따라 모든 재화의 재고는 장기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경기침체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올 1분기 0.8%, 2분기 0.3%를 기록해 단기에 모든 재화의 재고는 거의 증가하지 않고 있다.

넷째, 화폐에 대한 예비 수요, 즉 현금 수요는 예비적 목적으로 현금을 보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추세를 예상할 수 없다. 다만 전쟁, 경기침체 등과 같이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현금 수요는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케인지언이 현금 보유를 이렇게 늘리는 것을 ‘화폐 퇴장’으로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특히 2008년과 같은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에는 기업가뿐 아니라 소비자까지 위기 이전보다 현금(화폐)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기업들은 현금성 자산을 늘려왔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7841개 기업(2010년 기준, 자산 300억원 이상)의 현금자산(현금·현금성자산·단기금융상품·단기투자상품 등의 합계)은 2001년 약 184조원에서 2014년 약 500조원으로 늘었다. 국민총소득(GNI)은 2001년 약 683조4000억원, 2014년 약 1496조5000억원이다. 현금자산을 GNI로 나눈 비율은 2001년 약 27%, 2014년 약 33%다. 국내 기업들이 2001년에 비해 2014년에 경제활동을 영위하기 위해 현금을 더 많이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국내 물가상승률 0%대…디플레 국면이라고? 인플레 환경 속 민간 현금보유 늘어난 결과일 뿐
(표)는 2001년 이후 전년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여준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네 가지 요인과 기대, 각 재화 수요·공급의 영향이 서로 상쇄돼 나온 결과다. 최근 1년간의 소비자물가 변화는 화폐 재고 증대, 즉 인플레이션과 민간의 현금 보유 증가가 동시에 진행된 결과다. 따라서 전반적인 물가상승률은 높지 않지만 개별 재화(예를 들어 일부 지역의 부동산, 전세 등) 차원에서 가격 상승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가 하락에는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디플레이션 우려는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디플레는 나쁜 것인가
기술 발전·이윤 증가로 제품 가격이 하락하는 ‘성장 디플레’ 등은 유익


모든 디플레이션은 나쁜 것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디플레이션을 일반적인 ‘물가 하락’으로 정의해보자.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조지프 살레르노에 의하면 물가 하락을 초래하는 디플레이션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국내 물가상승률 0%대…디플레 국면이라고? 인플레 환경 속 민간 현금보유 늘어난 결과일 뿐
첫째는 ‘성장 디플레이션’이다. 지난 30~40년간 정보통신산업의 빠른 기술 발전과 자본투자로 생산성과 이윤이 증가하면서 PC, 휴대폰 등 관련 기기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1970년대엔 대형 컴퓨터가 한 대에 470만달러나 했으나 지금은 성능이 20배나 좋은 PC를 1000달러 이하에 살 수 있다. 기술이 재화 가격을 떨어뜨리고 생산성 향상을 이끌어 경제 전체 재화의 가격이 떨어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둘째는 ‘현금축적 디플레이션’이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현금 보유량을 변경한다. 경제위기 시에는 더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자 하는데 이때도 일반적으로 물가가 하락한다. 셋째는 ‘은행신용 디플레이션’이다. 은행이 신용을 축소하는 경우다. 뱅크런이나 정부의 축소적 통화정책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넷째는 ‘몰수적 디플레이션’이다. 그리스 사태 때처럼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예금자의 하루 인출 한도를 제한하는 경우다.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아르헨티나, 1990년대 말의 에콰도르, 옛 소련, 브라질 등에서 몰수적 디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이 경우는 민간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문제가 있다.

최근 국내 디플레이션 상황은 첫째, 둘째, 셋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요인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은 모두 유익한 것이다. 물가 하락은 화폐 구매력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첫째 요인은 최근 상황과 큰 관련이 없다. 셋째 요인은 부산저축은행 등이 파산한 시기에 적용할 수 있지만 현 시점은 오히려 은행신용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요인만이 최근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물가가 실제 물가(표 참조)보다 더 하락하지 않는 것은 실질적 인플레이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전용덕 < 대구대 무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