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북한개발연구소장은 “북한 내 185곳에 달하는 군 단위 이상 모든 중소도시의 개발 전략을 연구해 통일 후 ‘대동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김병욱 북한개발연구소장은 “북한 내 185곳에 달하는 군 단위 이상 모든 중소도시의 개발 전략을 연구해 통일 후 ‘대동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탈북 지식인 10명이 2012년 말 ‘하나원’(탈북민의 사회정착 지원을 위해 정부가 세운 기관)에 모였다. 북한의 개발 전략을 연구해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남한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시키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이듬해 탈북민 석·박사 학술동호회 모임을 만들었고, 지난해 12월에는 북한개발연구소(NKDI)를 설립해 기획재정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등록했다. 초대 소장을 맡은 김병욱 동국대 초빙교수는 “남한의 경제 발전을 주도한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본떠 이름을 지었다”며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KDI가 기여했다면, ‘대동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NKDI가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NKDI는 지난 22일 서울 중구 충무로1가에 사무실을 열고 본격 연구를 시작했다.

김 소장은 “그동안 탈북자들은 북한 연구의 자료나 도구로 활용돼온 게 전부였지만 앞으로는 탈북 지식인이 주체가 된 연구가 필요하다”며 “북한에 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우리가 머리를 맞대 NKDI를 북한 관련 최고 연구소로 키울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김 소장은 2002년 탈북 후 국내에서 북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탈북자 출신 박사 1호다. 그를 만나 최근 남북관계 현안과 북한 경제 등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8·25 남북 고위급 합의’(북한의 지뢰 및 포격 도발 후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6개항에 합의한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긍정적 평가는 많이 나왔으니 아쉬운 점부터 얘기하겠습니다. 합의 이후 남북한은 서로 말이 달라요. 남한에선 북한이 지뢰 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고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반면 북한은 확성기 방송 중단과 이로 인한 전시상황 해제를 말하고 있죠. 우리 정부가 원칙을 갖고 대응한 것은 적절했지만, 협상에서 더 강하게 나가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좀 더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어야 한다고 봅니다.”

▷확성기 방송을 통한 대북 심리전의 위력이 정말 대단한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북한 주민이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거든요. 요새는 단순히 북한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최신 가요도 들려주는 등 정서적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휴전선에 있는 북한 군인은 사상적으로 가장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확성기는 이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할 수 있는 위력이 있습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스스로도 체제 유지에 치명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8·25 합의 이후 대화국면이 계속 이어질까요.

“일단 9월에 후속 실무 회담을 열기로 했으니 지켜봐야죠. 다만 남측이 원하는 점진적 교류 확대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 체제는 교류 확대보다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와 담을 쌓는 고립 전략으로 가고 있어요. 이산가족 상봉도 과거보다는 크게 축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이 10월10일 노동당 창건일을 앞두고 또 한 차례 도발을 감행할 것이란 전망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는 이번 행사는 김정은이 부친인 김정일의 3년상(喪)을 끝내고 새정치를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2012년 4월 ‘광명성 3호’가 추락했던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 로켓을 발사할 가능성도 있어요. 북한은 겉으로는 대화 국면을 통해 유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적절한 타이밍을 이용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양면 전술을 지속적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각에서 나오는 ‘조건 없는 5·24 조치 해제’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섣부른 5·24 조치 해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해제하려면 조건을 내걸고 뭔가를 확실히 받아내야죠. 이번에 아쉽기는 했지만 우리 정부가 원칙을 세우고 강하게 밀고 나갔기 때문에 어느 정도나마 남북관계 진전이 이뤄진 것입니다. 대화국면이 조성됐다고 해서 무턱대고 열어서는 안 됩니다. 원칙 없는 양보가 남북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 있거든요. 긴장상태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이 경제난에 따른 내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도발을 일으켰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최근 좋아지던 북한 경제가 가뭄으로 올 들어 조금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북한 무역의 대부분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올 들어 중국 경제가 출렁하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북한이 도발을 일으킬 정도로 경제난에 봉착한 상태는 아니라고 봅니다.”

▷북한의 경제 상황을 좀 더 설명해주시죠.

“일시적인 침체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안정돼 있습니다. 북한 경제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바로미터는 쌀값이에요. 올 들어 북한 쌀값을 보면 ㎏당 5000~5200원(한국돈 630~650원)을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가뭄에도 사재기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김정은이 2014년 신년사에서 ‘알곡고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올해는 이 얘기가 빠지고 ‘식생활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고 했어요.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거죠.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경제난이 아니라면 어떤 요인 때문인가요.

“통치 불안이나 경제난 같은 내적 요인보다는 외적 요인이 더 컸다고 봅니다. 김정은 체제가 고립화 전략을 취하면서 주변국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요. 특히 북·중 관계가 그렇습니다. 중국이 전승절 행사를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 초청에 공을 들이는 반면 북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전승절 70주년 기념 행사를 앞두고 일종의 ‘훼방 놓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중국에 대한 ‘관심끌기’일 수도 있고요.”

▷북·중 관계가 안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정부 들어 정책의 무게추를 경제에 두고 있어요. 중국 입장에선 남한에 더 큰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북한은 중국에 기본적으로 많이 서운해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 하는 것도 중국의 이런 태도를 의식해서입니다. 러시아를 지렛대로 삼으려는 것이죠. 김일성도 이런 식의 ‘등거리 외교’ 전략을 썼습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통치 방식을 많이 따라하려고 해요. 김일성은 중국에 할 말은 하는 자주정치를 폈는데 김정일은 그렇지 못했거든요. 개혁개방 안 한다고 중국 정부로부터 추궁도 당했고요. 김정은은 김정일보다 강성이에요. 아버지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거죠.”

▷김정은 체제가 언제까지 갈 거라고 보십니까.

“김정은은 통치방식도 김일성처럼 집단지도체제를 따르고 있어요. 차이점은 김일성은 충분한 리더십이 있었지만 김정은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등 공포정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거죠. 김정은의 또 다른 약점은 정책 실패에 있습니다. 잇단 아파트 붕괴 사고 같은 것이 대표적이에요. 주민들의 불신과 불안감이 확산될 경우 체제 존립기반 약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북한개발연구소는 어떤 분야 연구에 집중할 계획입니까.

“통일을 위해선 남북한 지역 격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북한의 중소도시 개발을 위한 기초 지리 정보를 쌓아갈 생각입니다. 185개에 달하는 군 단위 이상 모든 중소도시의 공간 지리 정보를 구축하는 ‘185 프로젝트’가 1차 과제입니다. 이는 통일을 전후로 북한의 개발 전략을 짜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입니다. 가령 강원 정선은 탄광지대를 관광지로 만들었는데 북한의 폐탄광 지역도 이런 식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이죠.”

■ 김병욱 소장은…

김병욱 북한개발연구소장은 2002년 8월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탈출을 감행했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 순간은 지금도 자주 악몽으로 나타나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고 했다. 김 소장이 탈북을 감행한 이유는 신분에 대한 한계 때문이었다. 북한은 당 간부가 아니면 출세가 불가능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다. 그 역시 평양기계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고 친척들이 중국에 있다는 이유로 1990년대 초 평양에서 추방당해 남포, 청진 등을 전전해야 했다. 김 소장은 “나 자신의 출세는 둘째치고라도 아이들 삶이 더 걱정돼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탈북 후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북한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해 계속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논문 쓰는 일이었다. ‘목 따기 전술’ 같은 과격한 표현이나 주관적 논증에 익숙한 그에게 남한의 정제된 표현과 객관성을 갖춰야 하는 논문 형식은 또 다른 장벽으로 다가왔다. 결국 2008년부터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3년 동안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 결과 2011년 동국대에서 ‘북한의 지역방위체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3년 평양 출생 △평양기계대학 졸업 △2002년 8월 탈북 △경남대 북한대학원 석사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 △동국대·동덕여대 초빙교수 △북한개발연구 소장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