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노쇠한 주력산업, 여전한 규제족쇄
어느 단편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서산에 해는 지는데 아낙네의 갈 길은 멀다. 머리에는 온몸을 내리누르는 천근만근 보따리가 올려져 있지만, 어린 자식은 걷기 싫다며 업어달라고 보챈다.’ 우리 경제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 그동안의 먹거리는 점차 소진되고 있는데 새로운 먹거리는 오리무중이다. 가계부채는 경기회복을 짓누르고 임계점에 도달한 청년실업은 세대갈등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최근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등 한국 대표 업종들이 예외 없이 경쟁격화에 따른 판매 부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표주자인 삼성전자마저 기대에 못 미친다는 분석이 많다. 매출과 영업이익의 2분기 실적은 전(前)분기보다 개선됐지만 전년 동기 대비로는 각각 7.3%, 4% 줄었다. 특히 스마트폰이 주종인 IM(정보기술·모바일)사업부문 영업이익은 작년 동기 대비 37.5% 감소했다. 반도체 부문은 상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스마트폰, 액정표시장치(LCD) 등의 수요가 줄고 있어 3분기에 큰 폭의 실적 개선이 어려울 전망이다.

자동차산업도 수출과 내수 모두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2분기 영업이익은 1조7000억원과 6500억원으로 각각 전년 동기 대비 16.1%, 15.5% 감소했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판매 점유율 하락도 우려스럽다. 2015년 상반기 점유율은 8.5%로 2011년 8.6%에 못 미치고 있다.

철강산업도 글로벌 경기침체와 원자재 가격 약세, 값싼 중국산 철강재로 인한 경쟁 심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 사업 실패로 지난 2분기에 무려 4조7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상선 수주격감을 메워주는 차세대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여겨졌던 해양플랜트 사업이 재앙의 진원지다. 충분한 준비 없이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일부 선사의 경우 유상증자 등 재무적 보강을 하지 않으면 ‘계속기업’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같은 주력 산업의 노쇠는 상당 정도 예견됐다. 경제활력 저하에 따른 저성장의 구조화가 바로 그것이다. 예의 주시하지 못했지만 우리 경제는 이미 인구구조에서 변곡점을 맞이했다. 가장 왕성한 경제활동을 수행하는 35~55세 인구가 2011년에 1673만명을 정점으로 2012년부터 하향곡선을 그렸다. 따라서 정책운영의 질적 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 방향은 ‘규제개혁을 통한 경제활력 제고’다. 하지만 정치권은 전혀 무감하다.

2012년 4월 19대 국회 총선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야당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총선 공약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을 내세웠다. “30대 그룹을 3000대 전문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재벌 해체 공약도 나왔다. 기업을 손보면 우리 경제의 모든 문제가 풀릴 것으로 착각했다. 이 같은 정책 사고를 가진 국회가 어떤 규제개혁을 해낼 수 있겠는가. 각종 경제활성화법안이 계류 중인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 희망 섞인 소식이 들린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28일 독일연방 금융감독청에 자본금 4000만유로의 인터넷전문은행 현대캐피털뱅크유럽 설립 인가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자동차 할부·리스·보험 등 각종 자동차 금융상품을 판매하고, 딜러를 대상으로 대출하고,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수신 업무도 할 계획이란다. 딜러들에게 자금 대출을 해주면 영업망을 확장할 수 있고 그만큼 현대차를 더 팔 수 있다.

현대차가 독일에 인터넷은행을 세우는 이유는 규제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공정거래법에 따라 상호출자제한집단은 은행을 설립할 수 없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산업자본이 금융회사에 대해 의결권을 가진 지분을 4%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정치권은 독일에서는 되고 국내에서는 왜 안 되는지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정치는 그 나라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프트파워이지만 한국에서 정치인은 규제를 양산하는 ‘영혼없는 자동인형’일 뿐이다. 삼류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dkcho@mj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