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철학 잃은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일고(一考)
시장질서는, 예를 들면 법과 공공정책, 그리고 이들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와 국가 등 수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계적 현상이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지키는 인격존중, 직업윤리, 약속이행 등 도덕규칙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규칙 덕분에 낯모르는 의사에게 자신의 병든 몸을, 은행에는 거금을 맡긴다. 서로를 잘 모르면서도 마음 놓고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규칙을 따르는 동물(rule-following animal)’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거성 하이에크의 말이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 법, 정치, 국가, 그리고 시장의 내적 구조를 형성하는 지식, 인지, 인성, 시간개념, 진화 등에 대해서는 깊은 철학적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직한 경험규범적 인식을 위해서는 경제학이 철학과 융합해야 한다. 이 융합학문이 독자적인 ‘경제철학’이다.

경제철학은 고용, 환율, 주택 등 일회성의 특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학제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제공해 지식소비재를 풍성하게 하고 다양한 지적 갈증을 해소시킨다. 경제철학은 산업계의 자본재와 동일하다. 경제가 번영하고 풍요로운 소비재를 공급하려면 이 자본재가 풍부해야 한다. 현재를 중시해 소비를 늘리고 소비재 생산에 치중하면 장차 풍성한 소비를 위한 자본재가 줄어들거나 소멸돼 번영은 멈춘다. 지식산업에서 자본재 역할을 하는 게 경제철학이다. 경제철학이 든든해야 지식소비자인 대중에게 보다 풍요롭고 정확한 지식소비재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철학을 철학자에게 맡길 수는 없다. 시장원리를 모르는 철학자의 지식은 경제학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업을 중시했던 애덤 스미스가 경제·법·윤리학을 융합해서 탐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대학교육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류경제학에는 철학이 없다. 철학적 성찰은 불필요하다는 믿음에서다. 수요·공급의 틀 안에서 계량·수리를 이용해 이론과 정책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든 것들 대부분은 쓸모도 없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훌륭한 경제학자가 되려면 경제학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점잖게 꾸짖었다. 미국 시카고대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철학을 모르는 경제학자는 외줄타기 광대와 같다”고 꼬집는다.

한국 좌파는 ‘평등철학’과 융합된 경제철학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높다. 자유, 번영에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사회주의 지식자본재는 풍부하고 그런 생산에도 열정적이다. 지식소비재도 다채롭다. 좌파 이념이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목할 것은 그런 좌파와 싸워 이겨야 할 ‘자유철학’과 융합된 경제철학이다. 이는 자유, 번영을 위한 믿을 만한 자유주의 지식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자본재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그런 지식자본재 축적이 빈약하다. 자유주의 경제철학이 홀대받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 없이는 자유주의의 심오한 가치, 생동감 있는 얼과 정신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일관된 자유주의 관(觀)을 가질 수도 없다. 일각에선 통계적 조작, 비용편익 분석에 치중하는데 이는 자유, 법치, 법, 시장을 정신도 없고 얼도 빠진 자원배분기계로 만드는 게 아닌가.

자유주의 지식산업계는 일회성 지식소비재 비중이 너무 큰 게 아닌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장차 지식소비재를 생산할 원천인 지식자본재는 줄어들고 종내에는 소멸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케인스의 세계에 빠져 소비만 중시하다가는 자본축적이 감소돼 다양하고 풍성한 소비재 생산능력 자체가 고갈되듯, 지식소비에 치중하면 지식자본재가 고갈돼 대중이 소비하는 자유주의 지식은 논리와 품위를 잃고 천박해질 것이다.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 지식산업계는 반성해야 한다. 공공정책에서는 케인스를 반대하면서도 막상 자유주의 지식의 생산에서는 소비를 강조한 케인스를 따르는 것은 아닌지. 자유주의 경제철학의 왕성한 생산을 기다려 본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