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증거물
전근대식 원님재판과 현대 법치국가의 법정을 구별하는 원칙들이 있다. 죄형법정주의가 그렇다. 법률 없이는 범죄도 없고, 형벌 또한 없다는 이 원리를 국가권력의 자기제한이라고도 설명한다. 설사 아무리 비난받을 행위여도 법률로 규정돼 있지 않다면 처벌할 수 없다. 동시에 명백한 범죄라도 법률에 정해진 처벌만 가능하다는 원칙이다. 현대 국가의 개인은 이렇게 국가권력과 절대권력자로부터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는다.

또 하나는 증거에 의한 재판이다. 어떤 재판이든 증거에 따라 유·무죄가 결정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는 재판은 금지다. 그 어떤 솔로몬일지라도 심증만으로는 유·무죄의 책임을 가릴 수 없는 게 현대의 민주 법정이다. 많은 판사가 유죄의 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것도 ‘증거 불충분’ 때문이다.

검찰과 경찰이 증거물 확보에 전력을 다하는 것도 그래서다. 과학수사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넣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법정을 나서면서 속으로 웃는 범법자들도 없지 않겠지만, 법정증거주의 전통 덕에 다수의 인권이 보장된다. 유죄를 판가름하는 것이기에 법정의 모든 증거품은 과학적이고 합법적인 것이어야 한다. 물론 법원이 발부하는 영장 없이는 수색도, 압수도 엄격히 금지돼 있다.

엊그제 서울중앙지법이 무차별적인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집행에 제동을 걸었다. PC 외장하드 USB 등을 통째로 들고가지 못하게 하고 유죄의혹이 있는 문서나 대상물로 압수를 제한한 것이다. 가령 세일즈맨이 여성들 치마 속을 몰래 찍다가 잡혀도 휴대폰에 담긴 영업용 전화번호부는 즉각 돌려줘야 한다는 식이다.

‘컴퓨터 한 대에 수십만개의 파일이 들어 있는데 일일이 다 영장을 받으란 말이냐’는 검찰의 볼멘소리도 들리지만 법원의 방향이 맞다고 본다. 기업 수사라도 벌어지면 기획실 등 주요부서의 서류를 다 들고가 회사 경영이 마비될 정도니 무소불위 압수수색의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번 압수된 물품은 되돌려받기조차 쉽지 않다.

이제야말로 검찰이 진짜 실력을 발휘할 때다. 컴퓨터, 전자문서, 이동저장장치, 사이버공간으로 범죄의 주 무대나 수단이 바뀐 시대상에 적응하면서 인권수호라는 명제에도 부응해야 한다. 과학수사니, 수사의 진화니 하는 멋진 구호들이 이제야 실현될지 주목된다. 기업인을 수사한다며 다섯달씩 매달리고도 구속영장은 두 번씩이나 내리 기각되는 수사가 과연 개선될지도 궁금하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