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세상을 바꾼 아이디어의 비밀
15세기 인쇄술과 17세기 렌즈 혁명, 19세기 백신 개발과 20세기 광섬유 발명. 엉뚱한 조합 같지만 연결고리가 분명하다. 인쇄 출판 덕분에 안경시장이 생겨났다. 광학 혁신이 만든 현미경은 세포와 박테리아, 백신 개발을 이끌었다. 망원경은 렌즈와 천체 물리학의 혁명을 불러왔고, 디지털 화면은 정보통신기술과 광섬유 개발까지 가능케 했다. 이 아이디어 혁신의 매개는 유리였다.

발명·혁신의 기원 '벌새효과'

이처럼 한 분야의 혁신이 완전히 다른 영역의 광범위한 변화로 이어진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레이저는 바코드와 스캐너의 기술로 이어져 대형마트의 탄생을 도왔다. 세균의 발견과 ‘청결 테크놀로지’는 초고성능 컴퓨터칩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은 신작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how we got to now)》에서 인류의 기술개발 과정을 ‘벌새효과(hummingbird effect)’라는 새 용어로 설명한다. 인과관계가 적은 일방향의 ‘나비효과’ 대신 생물의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처럼 전혀 다른 분야의 상호작용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식물이 꽃가루 외에 꿀을 생산하자 벌새가 꿀을 얻기 위해 다른 새는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헬리콥터 비행법을 개발한 데서 착안했다. 1초에 90회까지 날갯짓하며 공중에 떠 있는 벌새의 신기술은 식물의 진화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세상을 바꾼 혁신은 네트워크화된 지식과 연관 아이디어의 접목에서 출발한다. 20세기의 온갖 발명에 기여한 미국 벨연구소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연구개발(R&D)에 더 많이 투자한다. 지속 발전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중국도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내년이면 8세대 액정표시장치(LCD) 생산량이 한국을 앞지를 전망이다. 이러다 플렉시블·플라스틱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기술에서도 언제 밀릴지 모른다. 산학연 융합 연구로 원천 기술이 기업에 자연스레 유입될 수 있도록 하고 관련 인력의 산업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한국의 특허 출원 규모는 양적으로 늘었다지만 질적으로는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질적 수준을 따지는 인용횟수가 평균 5.2회로 미국(11.3회)의 반토막 이하다. 주요국에서 특허를 확보한 비율도 10.6%에 불과하다. 미국(35.9%)과 일본(31.4%)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이래서는 해외 시장 확보도 공염불일 뿐이다. 국가 R&D 예산을 늘려서라도 부가가치가 큰 원천기술을 기업과 함께 확보해야 한다.

R&D 예산 2.3% 줄이겠다니

그런데 과학기술 분야의 내년 R&D 예산이 올해보다 2.3% 줄어들 모양이다. 내년 전체 예산이 4.1% 늘어나는 것과는 정반대다. R&D 예산 삭감은 25년 만에 처음이어서 더 충격적이다. 보건·복지·고용·교육 분야의 지원 수요 때문에 재정 여건이 투자 요구에 부응하기 어렵다는 게 정부의 설명인데 안쓰럽다. 기업의 연구·인력개발비 세액 공제마저 줄이겠다고 한다. 여기에 각종 규제들은 여전히 거미줄이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경쟁국들이 힘을 합쳐 뛰는 판에 우리만 거꾸로 가고 있다.

벌새를 춤추게 하지는 못할망정 날개를 묶는 우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인류의 번영을 주도한 아이디어 혁신은 산학 협력의 자유로운 날갯짓에서 나왔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