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국형 슈퍼컴퓨터' 개발 서둘러야
현대 과학 패러다임의 중심축은 경험과 이론에서 계산과 데이터로 바뀌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연구개발에 필요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데이터 처리를 위한 극한의 컴퓨팅 파워가 요구되고 있다.

슈퍼컴퓨팅은 초대용량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처리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한다. 또 가상화 기술을 통해 극대와 극미, 초고속과 초저속, 초고위험 등 인간의 역량으로 접근할 수 없는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컴퓨터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슈퍼컴퓨터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슈퍼컴퓨터 ‘왓슨’은 인간을 상대로 한 퀴즈쇼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슈퍼컴퓨터는 산업 현장에서 실시간 이미지 분석을 통해 불량품을 검사하는 데 쓰인다. 인터넷 포털 서비스에선 음성인식과 자연어 처리, 이미지 자동분류 기법에 슈퍼컴퓨터를 활용한다. 슈퍼컴퓨터는 새로운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 세계의 슈퍼컴퓨터를 조사하는 ‘국제 슈퍼컴퓨팅 콘퍼런스’에선 지난 6월 국가별 슈퍼컴퓨터 순위를 발표했다. 한국은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이며 세계은행 집계 기준 국내총생산(GDP) 순위 14위다. 하지만 현재 기상청에서 운용 중인 국내 최고 수준의 슈퍼컴퓨터 ‘우리’의 슈퍼컴 순위는 191위에 그쳤다.

표면적인 순위보다 더욱 중요한 건 슈퍼컴퓨터 개발 역량이다. 미국과 일본은 20~30년 전부터 자체 기술로 슈퍼컴퓨터를 제조하고, 전국에 걸쳐 고성능 컴퓨팅 센터를 구축해 최첨단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최근엔 중국까지 가세해 슈퍼컴퓨터 관련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중국은 세계 제일의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반면, 반도체와 IT 서비스 강국이라는 한국은 수백억원에 달하는 슈퍼컴퓨터를 미국과 일본 기업에서 사들여 오는 실정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스마트폰과 같은 산업에서 보듯이 기술자립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항목이다. 슈퍼컴퓨터도 선진국의 기술에 의존해선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이 슈퍼컴퓨터 시스템을 해외 슈퍼컴 제조기업에서 구입하는 것은 장기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 한국의 과학기술과 산업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슈퍼컴퓨터 개발의 자체적인 역량을 확보하는 전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은 다양한 IT분야 기술과 산업발전 저력을 가진 나라다. 우리가 가진 IT 역량과 그동안 축적한 슈퍼컴퓨팅 관련 기술을 효과적으로 조합해 효율적인 한국형 슈퍼컴퓨터 개발 전략을 수립한다면, 단기간 내에 우리 기술로 슈퍼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한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슈퍼컴퓨터가 만들어 낼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선도적인 기술 개발로 경쟁국들을 따라잡고, 이내 앞서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중국의 추월과 일본과의 기술격차 확대라는 기로에 서 있다.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일본을 따라잡아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는 학계와 연구소, 기업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형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초고성능컴퓨팅 발전 포럼’을 발족했으며, 필자가 이 포럼의 위원장을 맡게 됐다. IT와 슈퍼컴퓨터를 활용할 기업과 대학, 연구소의 응용 능력 및 정부의 비전제시와 정책의지, 충분한 예산지원이 필요한 일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슈퍼컴퓨터 개발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만큼, 이 포럼이 한국의 슈퍼컴퓨팅 미래를 그려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강성모 < KAIST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