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벤처캐피털인 A사는 올초 200억원 규모의 벤처펀드 조성을 추진하다 포기했다. 민간 투자자들로부터 190억원을 모았지만 2억원(1%)을 출자받아야 하는 모태펀드의 관문을 넘기가 만만치 않았다. 신청서류를 만들고 현장·구술 심사를 준비하는 데만 두 달가량 걸렸다. 펀드 조성이 미뤄지자 출자를 약속했던 민간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이탈했다.

벤처캐피털 B사는 최근 해외투자자로부터 한국 콘텐츠기업에 투자하는 펀드에 출자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보류했다. 해당 투자자가 ‘투자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모태펀드의 출자를 받은 국내 벤처펀드는 중소기업청에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벤처투자 이젠 민간 주도로…연기금·보험 등 뭉칫돈 끌어들인다
정부가 19일 발표한 벤처투자 활성화 방안은 규제로 막힌 벤처시장의 자금 흐름을 뚫어 ‘자금투자-기업 성장-투자금 회수-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정착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책자금 없이 벤처펀드 설립

국내에선 민간 자금으로만 이뤄진 벤처펀드를 찾아보기 어렵다. 현행법(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상 벤처펀드에 모태펀드가 1% 이상 의무 출자하도록 돼 있어서다.

작년 말 기준 벤처펀드와 창업투자조합의 약정잔액 12조2000억원 중 정부 출자금 비중은 40.3%에 달한다. 2007년 26.8%에서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미국(17%) 중국(23%) 영국(24%) 일본(36%) 등은 정부 출자 비중이 한국보다 낮다. 정부가 인수합병(M&A)이나 펀드 투자자끼리 지분을 사고파는 중간회수(세컨더리) 거래에 대해 민간 펀드 설립을 허용하기로 한 배경이다.

금융위는 “민간 벤처펀드가 나오면 다양하고 창의적인 투자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되고 연기금 보험 캐피털 등의 벤처투자도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요트를 만드는 벤처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해양레저펀드 등 정부가 투자하기 힘든 분야에 대해 민간의 창의적인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사·PEF, 벤처투자 유도

200조원 규모로 커진 사모펀드(PEF) 자금을 벤처시장으로 끌어오는 방안도 추진된다. 금융위는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PEF에 벤처펀드와 비슷한 세제 혜택을 줄 방침이다. 금융위는 내년 이후 PEF의 벤처 투자에 대해 배당소득 비과세나 주식양도소득세 감면 등의 혜택을 주는 방안을 기획재정부와 논의하기로 했다.

증권회사가 벤처펀드에 출자하거나 직접 투자할 때는 건전성 지표에 부과하는 위험가중치를 현행 20~24%에서 12~16%로 낮추기로 했다. 벤처투자업계가 투자금을 제대로 회수할 수 있도록 중간회수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마련된다.

벤처 투자자들은 대부분 자금 회수를 기업공개(IPO)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벤처기업이 상장하기까지는 평균 13.8년이 걸리는 등 IPO로 자금을 회수하는 게 만만치 않다. 금융위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창업진흥법상 출자자의 중도 탈퇴를 금지하는 규제를 풀어 벤처펀드 투자자가 펀드 만기 전에 자신이 출자한 지분을 또 다른 투자자에게 매각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로 했다. 정부가 직접 시장에 나온 지분을 사들이는 3000억원 규모의 세컨더리전용펀드도 조성하기로 했다.

성장사다리펀드를 자산운용사 형태로 법인화하고 민간 자본을 유치해 ‘반관반민’ 형태로 지배구조를 개편하기로 했다. 좀 더 자유로운 투자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 모태펀드

정부가 정책자금을 특정 벤처기업이나 상품에 직접 투자하지 않고 개별 펀드에 출자하는 ‘펀드를 위한 펀드(fund of funds)’. 2005년 7월 처음 결성 이후 작년 말 기준 1조8341억원 규모로 운용되고 있다.

■ 성장사다리펀드

정부가 벤처생태계 촉진을 위해 2013년 8월 만든 펀드. 산업은행 등이 1조8500억원을 출자했다. 민간 자금을 유치해 내년 7월까지 6조원 규모로 늘어난다.

하수정/오동혁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