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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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최인한 한국경제신문 편집국 부국장 겸 한경닷컴 뉴스국장>

“외교관은 화려해 보이지만 굉장히 어렵고 고달픈 직업입니다. 총만 안 들었지, 최전선에 나가있는 군인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직 외교관 인사를 정권의 논공행상이나 인사 돌파구로 이용하는 관행이 남아있죠. 그래선 안 됩니다. 국제관계가 급변하는 글로벌 시대입니다. 다른 어떤 부처보다도 외교 분야엔 전문가들이 중용돼야 합니다.”

17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사옥에서 만난 권순대 전 인도대사(사진)는 쓴소리부터 했다. 그는 외무고시 1기로 37년간 외교관으로 살았다. 적도 동지도 없이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전장(戰場)에서 문외한인 관료나 정치인을 여전히 대사로 파견하는 한국 외교가 덜 여물었다고 지적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 10여년이 흐른 지금 펜을 든 이유다.

권 전 대사의 신간 '한 외교관의 도전' 표지.
권 전 대사의 신간 '한 외교관의 도전' 표지.
권 전 대사가 자서전 형식으로 집필한 ‘한 외교관의 도전’(기파랑)은 꼼꼼한 업무일지를 펴 보는 느낌이다. 자신의 외교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400쪽 분량의 책에는 40여년 외교관 생활 당시의 생생한 현지 정세와 상황 판단이 담겼다. 그는 “외교관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우리나라 외교의 역할과 방향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도자의 냉철한 인식과 판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권 전 대사는 “일본에 대한 국민 감정이 안 좋다고 해서 정치 지도자가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관계가 좋을 때만 정상회담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회담을 창구로 활용해 우리 측 주장을 할 수도 있다” 며 “연내 한일정상회담 가능성이 점쳐지는 등 최근 정부의 움직임은 환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벤치마킹 모델로는 그가 거친 여러 나라들 중 유럽 강소국가를 꼽았다. 대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권 전 대사는 “한국이 세계 14번째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등 외형은 커졌지만 개인소득이나 삶의 질 같은 내실은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면서 “대국인 미국식 체제보다 강소국가 모델이 잘 맞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청년들이 눈을 돌려 과감히 해외 진출에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이 호기입니다. 한국은 국제사회 기여도에 비해 국제기구 종사자가 적어요. 노력하면 국제기구에서 일할 기회가 많다는 거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상징성이나 상황도 맞아떨어지고,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있어요. 국제기구 진출이 늘어나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도 올라갈 겁니다.”
/ 진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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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전을 냈습니다.

“외교관은 밖에서 보듯 화려한 직업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고 고달픈 직업이에요. 군인이 일선에 나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아무나 외교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있어요. 인사 문제 해결이 안 되면 대사로 내보내잖아요. 외교관 인사를 정권 논공행상이나 인사 돌파구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그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 오래 외교관 생활을 했는데, 박근혜 정부 외교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현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에 치중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미국이 ‘한국은 중국 편에 선다’고 생각하게끔 하면 큰 실수입니다. 물론 우리 정부가 그렇게 가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그런 인상을 준다면 문제가 되죠. 동북아시아에서 강대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 껴 있지만, 확고한 동맹국이자 후원자인 미국이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동북아에서 외교를 전개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어요. 진영 논리가 아니라 자국 이익이 최우선인 시대가 됐잖아요. 지도자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과는 과거사나 위안부 문제 때문에 굉장히 국민 감정이 안 좋아요.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가 국민 감정에만 의존해 외교를 하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요.”

- 대통령 취임 2년이 넘었는데 일본과는 정상회담도 못하고 있죠.

“한일정상회담은 조속히 해야죠. 회담을 하는 게 상대 요구에 굴복하는 게 아닙니다. 양국 관계가 안 좋더라도 회담은 할 수 있어요.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도 회담을 열지 않았습니까. 정상회담이 창구가 돼 우리 주장을 요구, 관철할 수도 있는데 기피하는 건 외교적으로 옳지 않은 판단이라고 봐요. 최근 정상회담 연내 개최를 위한 정부의 움직임은 환영할 만합니다.”

- 남북관계는 어떻게 봅니까. 김정은 체제가 확고해지는 분위기인데요.

“사실 전 헷갈렸어요. 스위스 유학파인 김정은이 서양의 개방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지정학적 운명이나 세습 체제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은 세계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의 김정은 체제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측면도 강하다고 봅니다. 김정일 같은 경우 10년 이상 김일성의 섭정 하에 후계자 수업을 받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있었잖아요. 김정은은 그게 없었거든요. 정권이 확고해지면 과감하게 중국식 개방 체제를 따르지 않을까 전망합니다. 변화가 불가피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 여러 나라를 경험했는데 우리나라의 벤치마킹 모델을 추천한다면.

“유럽의 작은 나라들 모델을 택하는 게 좋습니다. 경제규모 세계 14위 수준으로 우리나라가 외형은 확실히 커졌죠. 그런데 내실이 빈약합니다. 중산층이 어렵다고 하고, 개인소득이나 삶의 질도 선진국 수준이 안 돼요. 대국주의보다는 강소국가 모델로 나가는 게 맞습니다.

대사를 지냈던 스위스 사례를 들고 싶은데요. 사회민주주의 유럽 국가들이 복지 부담이 큰 단점이 있는데 스위스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스위스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학에 안 가도 괜찮아요. 직업을 갖는 데 대학은 중요 기준이 아니거든요. 한국은 대학 진학률도 높은데 대학 졸업장만으로 직업을 갖기 힘든 구조잖아요. 스위스식으로 직장 위주 사고를 갖고, 적성에 맞는 직장을 택하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직장생활 하다 필요하면 대학에 갈 수 있는 길도 열려있죠.”
/ 진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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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이들에게 국제기구 문을 두드리라고 권했습니다. 전망이 있나요.

“그럼요. 호기를 맞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국제사회 기여도에 비해 국제기구 종사자가 적어요. 노력 여하에 따라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 있죠. 동북아에서만 봐도 중국은 대국이고, 일본은 확실히 영어 등 외국어능력이 떨어집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어학에 자질 있고 기회도 많이 받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어요.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했으면 합니다.”

- 영어공용화도 필요하다고 보는지요.

“부분적으로 영어공용화를 시도할 때라고 봅니다. 영어가 필수인 전공, 예컨대 대학 정치외교학이나 국제경제학 쪽부터 시작했으면 싶어요. 학생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된 측면은 있는데요. 영어 습득 환경을 함께 제공하면서, 과감히 도입하되 단계적으로 추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외교관으로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인상적인 정치인은 누구였습니까.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 씨는 아주 소탈하고 감추는 게 없었어요. 교수 출신으로 학자다운 면도 있었고요. 정치적으로는 그리 많이 크지 못했습니다만. 김종필 씨는 스위스와 벨기에에서 근무할 때 만난 적 있어요. 박식하고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나에 꽂혀 밀고 나가는 정치인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기획형 스타일이란 느낌을 받았죠.”

- 다시 외교관이 된다면 어느 나라에 가고 싶나요.

“중국입니다. 우리 이웃에다 떠오르는 나라니까요. 인도 대사를 지냈는데 인도는 같은 아시아 국가지만 문화나 사고방식은 우리와 좀 다릅니다. 중국은 우리와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잖아요.”

- 외교관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주세요.

“우리나라가 소국이 아니에요. 지정학적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근접해 있기 때문에 소국이란 느낌을 받는데, 사실은 굉장히 큰 나라입니다. 다만 남북이 분단된 게 아킬레스건이죠.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갈수록 동족의식이 희석될 가능성이 높은데요. 젊은이들이 북한 사람들을 적으로 보지 말고 형제이자 동족이란 인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주로 강대국만 바라봐 왔거든요. 서구 중소국가들, 특히 유럽의 강소국가들 사고방식 보다 많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같은 나라들 보면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죠. 외국에 대한 투자가 엄청납니다. 그런데 이 투자가 결국 자국에 돌아와요. 해외 투자나 원조를 쓸모없는 것, 뺏기는 걸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기브&테이크’란 거죠.”
/ 진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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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무고시를 없애고 국립외교원을 설립한 건 어떻게 평가합니까.

“잘했죠. 고시 제도가 초기에 큰 역할을 한 건 맞습니다. 단 지나치게 암기식 교육으로 흐른 건 문제였어요. 외교란 건 실제 상황에서 하는 겁니다. 담판도 하고 설득도 해야 하는데요. 암기식 필기시험인 고시로 외교관의 자질을 가려낼 수 있느냐가 문제였죠. 최근 도입된 외교원 체제는 장기적으로 평가하면서 외교관으로 적합한지 판단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외교관에도 여러 분야가 있어요. 우선 지역적으로 다양하죠. 미국이나 유럽 같은 강대국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용적으로도 국제법, 조약, 어학, 문화 등 여러 요소가 있어요. 막연히 외교관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이란 자세가 필요합니다.”

-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외교관은 ‘제너럴리스트’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 걸 권합니다. 외교관이 되려면 외국의 책을 다독해야 해요. 교재만 파고들어선 안 됩니다. 헨리 키신저의 책이라든지, 국제관계를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책들이 많아요. 외교 이론이나 해외 문화·경제도 알아야죠. 그 분야의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적 흐름을 읽어내는 수준은 돼야 하니까요. 외국어 능력과 체력도 갖추라고 당부합니다.”

-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정리한다면.

“앞서도 말했지만 외교관은 세계 최전선에 나가있는 전투원이나 다름없어요. 스스로도 잘 무장해야 하지만 비전문가를 내보내는 건 정말 지양해야죠. 기획재정부나 법무부 인사에 비전문가를 기용하나요? 그렇게 안하잖아요. 사실 외교관 자체에 이미 국제법·문화·경제전문가 등 여러 부류가 있어요. 전문가 풀(pool)을 잘 활용해야지, 왜 자꾸 문외한을 기용합니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외교를 해야 합니다. 인식 전환을 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파고들어야죠.”

- 휴가철인데 여행지로 추천하고 싶은 나라는 어딥니까.

“남프랑스 지방을 추천하고 싶어요. 저도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자연이 정말 좋아요. 강렬한 태양이 있고 라벤더향 같은 향기가 있어요. 풍경이 그림 같다기보다는 ‘향기가 있는 곳’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 권순대 전 대사는…

경북 영천 출생.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7년 공직(외교부)에 입문했다. 이듬해 외무고시 1기로 합격해 프랑스, 코트디부아르, 벨기에, 영국, EU 대표부, 파키스탄, 미얀마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외교부 감사관과 문화외교국장을 거쳐 케냐·스위스·인도 대사를 지냈다. 40여년간 외교관 생활을 마친 뒤 부산대와 창원대에서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인도 대사 시절의 경험을 살린 ‘한국과 인도의 수교 30년’이 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 진연수 한경닷컴 기자 jin9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