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슬픈 민주주의, 그리스(2)
그리스 투표는 새삼 숨은 표 논란을 일으킨다. 50 대 50이라던 여론은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20%포인트 이상의 압도적 차이였다. 민주주의는 국민을 비열하게 만든다는 바로 그 암수(暗數)의 구조학이 작동했다. 구제금융 조건에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 유권자들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그들 중 상당수는 입을 닫은 채 조용히 행동에 돌입했던 것이다. 도덕적 열등감이 밀려들고 다소는 망신살도 뻗치지만 한 번 눈을 질끈 감으면 그래도 돈이 나올 수 있다.

이미 2000년 전부터 투표를 해왔으며 고대 그리스를 기어이 복지국가로 만들었고 그 결과 조국을 로마의 노예로 내팽개친 바로 그들이다. 공중 목욕탕의 권리와 저녁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감상할 수 있는 입장권을 요구했던 당시의 국민들과 다를 것이 없는, 타락한 민주주의가 2500년 만에 정확히 재연되고 있다. 책임지지 않는 국방과 바보들의 공동 지배 결과는 언제나 국가의 몰락이다. 물론 그리스인이라고 해서 특별 취급돼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들에서 문명을 일으켰고 철학을 논하고 정치학과 수학을 강의했다.

민주주의가 국민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다. 양식 있는 시민들의 제비뽑기였던 ‘n분의 1 민주주의’는 점차 바보들의 대중선거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선거가 거듭될수록 익명에 기댄 비열한 자들의 선택이 지배적 전략이 되고 만다. 이제 개인 아닌 국가들이 도덕적 타락을 경쟁하는 시대가 왔다. 국가라는 무생물이 인간을 흉내내 도덕심을 가장하고 나선 것은 20세기 들어서부터다. 어떻든 도덕적 해이는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전염될 것이다. 부채비율 100%가 넘는 대부분 나라의 국민들은 이제 그들의 정치지도자들을 은근히 치프라스의 길로 몰아간다.

항상 첫 유리창이 깨지는 것이 문제다. 이제 멀쩡한 유리창에까지 돌멩이가 날아들 것이다. 국가부채는 그리스 177.1%, 이탈리아 132.1%, 포르투갈 130.2%, 스페인 97.7%다. 그리스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국채 가격은 전염병적 추락이 불가피하다. 지금 남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의 금리차는 2%포인트 남짓이지만 4%포인트, 아니 그 이상 확대될 수도 있다. 독일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율은 지난 주말 미국의 세계전략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은 독일에 더 큰 부담을 요구하면서 동생들을 잘 다독거리기를 채근하고 있다. 혼자라면 가능하지만 미국이라는 시누이가 버티는 한 독일 혼자 치프라스를 벌주기는 어렵다. 사실 독일은 남유럽 돼지 형제들 덕분에 점점 강해졌다. 단일 환율은 독일에는 고단한 축복, 남유럽에는 달콤한 저주였다. 유로화가 출범할 때 내려진 신탁은 그렇게 지금까지 틀린 것이 없다.

다른 하나의 운명적 실패는 소위 복지국가다. 복지국가론은 20세기 대중정치가 만들어낸 희대의 사기극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다. 국가가 나의 노후를 걱정해준다는 달콤한 주장만큼이나 거짓말은 없다. 국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준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국가들은 그 비용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에게서 훔쳐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 밥이든 등록금이든 연금이든 그 무엇이든 국가가 자비로운 얼굴을 하면서 내려주는 모든 것은 알고 보면 ‘시간의 장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국가부채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뻔뻔스럽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기 때문에 투표소 휘장을 걷고 들어설 때 우리는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자신의 양심을 한 번 슬쩍 쳐다본다.

침묵의 포퓰리즘으로 유명한 것은 일본이요, 광장에서의 달변은 그리스다. 일본 노인들은 (너무도 선거가 자주 있으므로) 투표소에서 도장을 꾹 눌러 찍는 것만으로도 노인연금을 쉽게 끌어올린다. 그게 국가부채 240%의 비밀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얼굴은 평안하다. 그들에게도 밀실 하나면 충분하다. 한국 민주주의는 또 어떤 것인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