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가 삼성정밀화학 지분 5.02%를 보유 중이라고 지난 3일 공시했다. 작년 말까지 2.9%를 갖고 있다가 올 들어 2.12%를 장내에서 더 사들인 것이다. 삼성 측으로선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의 분쟁도 버거운데, 악연이 있는 헤르메스까지 등장했으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엘리엇의 법률자문을 맡은 넥서스가 헤르메스의 국내 대리도 맡고 있다고 한다.

헤르메스는 ‘투자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2004년 삼성물산을 공격한 전례가 있어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에도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지분 5%를 확보하고 투자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선 삼성물산 측에 삼성전자 보유지분 매각, 우선주 매입 소각 등을 요구했고 주가가 오르자 그해 말 주식을 모두 팔아 약 380억원의 차익을 챙겨 떠났다. 전형적인 ‘치고빠지기 전략’이었다. 삼성정밀화학이 그룹 지배구조 선상에 있지 않더라도 헤르메스의 행보에 주목하는 이유다. 더구나 엘리엇의 요구사항은 헤르메스의 전략과 빼닮았다.

국내 증시가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된 것은 공격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 탓이다. 헤르메스 외에도 소버린, 칼 아이칸 등이 수시로 드나들며 국내 기업을 공격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국내 증권 법·제도가 빗장은 다 열어놓고 방범장치는 금지하는 기형적 구조인 탓이다. 기업들이 공격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하려면 장내 지분매입 외엔 방법이 없다. 자사주를 우호세력에 매각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될 정도다.

헤지펀드들은 겉으로는 지배구조 개선, 주주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내건다. 그러나 주된 목적은 시세차익 챙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는 반(反)재벌 도그마에 빠져 투기자본을 거들고 심지어는 옹호한다.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황금주 등의 방어장치가 선진국에는 다 있는데 한국에만 없다. 기업들이 안팎의 경영위기를 타개하고 미래 먹거리 찾기에도 힘겨운 판인데, 경영권 방어에 에너지를 소진해서야 무슨 경제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