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구 기자 ] 지방 소규모 국립대를 졸업한 A박사는 최근 성균관대 교수로 임용됐다. 경기도 소재 사립대 출신 B박사도 같은 대학 교수로 채용됐다. 성균관대 관계자는 “객관적 실적에 기반해 초빙한다는 기조”라고 설명했다.

15일 대학들에 따르면 대표적 ‘고학력 직종’인 교수직을 명문대 출신이 독점하는 구조가 깨지고 있다. 학벌이나 학연보다 실력 위주 교수 채용 풍토가 뚜렷해지는 추세다.

◆ "연구실적 보여달라" 성과만으로 평가

영화 '플란다스의 개' 포스터. / 출처= 공식 홈페이지
영화 '플란다스의 개' 포스터. / 출처= 공식 홈페이지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에는 교수가 되려는 시간강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연줄이 없는 주인공은 번번이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다. “우리나라는 원칙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던 그는 결국 아내의 퇴직금을 뇌물로 바치고 교수 자리를 얻는다. 영화는 학벌, 학연, 기존 교수들과의 관계가 교수 임용을 좌우하는 관행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객관적 지표에 기반한 채용으로 바뀌고 있다. 이찬규 중앙대 교무처장은 “대학들이 연구실적 위주로 교수를 뽑으면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 비율이 낮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 “중앙대는 공개채용과 특별채용으로 나눠 운영하는데 특채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굉장히 높다. 실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교수 채용에서 주로 보는 것은 논문이다. 전공별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경우 전임교원 채용 우선순위가 된다. 연구력 위주 평가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이공계엔 소위 보증수표로 통하는 학술지가 있다. ‘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 3대 과학저널에 실린 논문은 국제 학계가 주목한다. 이들을 통칭하는 ‘NSC’에 제1저자로 논문을 발표하면 국내 대학 교수 임용은 따놓은 당상이란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란 게 대학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플러스알파가 되는 건 분명하다.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급 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경우도 연구력을 공인받을 수 있다.
세계 3대 과학저널로 꼽히는 (왼쪽부터) 네이처·사이언스·셀. / 출처= 각 홈페이지
세계 3대 과학저널로 꼽히는 (왼쪽부터) 네이처·사이언스·셀. / 출처= 각 홈페이지
◆ 대학평가에 장사 없다…실력위주 채용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 각종 대학평가 확산이 변화의 계기가 됐다. SCI급 논문 게재 등 교수 연구력이 평가의 핵심지표로 부상했다. 교수들이 양질의 논문을 많이 쓰는 대학이 좋은 평가를 받는 구조가 된 것이다.

홍원표 한국외대 교무처장은 “교수 임용에서 연구력을 집중적으로 보는 건 대학평가와 연관성이 있다”며 “연구업적이 탁월할 경우 나이와 상관없이 특채로 뽑는다. 연구력을 보증하는 경력과 명망이 있으면 조교수 단계를 건너뛰고 부교수·정교수로 파격 임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부 평가뿐 아니라 대학 내부 학과별 평가도 중요해졌다. 학과 통폐합 등 대학 구조조정이 진행되기 때문. 건국대, 동국대 등이 학과평가에서 하위 학과 학생 정원을 줄여 상위 학과에 배분하는 방침을 택했다. 교수 채용은 학과 T.O가 날 때 진행되므로 개별 학과 의견이 중요하다. 자연히 실적 평가에 기여도가 높은 연구자를 선호한다.
(왼쪽부터)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캠퍼스. / 한경 DB
(왼쪽부터)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캠퍼스. / 한경 DB
◆ 해외에서 '학벌 편견' 덜한 것도 영향

국제적 평가를 받는 게 중요한 트렌드도 한몫 했다. 해외 평가는 국내 대학 서열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출신 대학에 대한 편견 없이 연구내용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고, 여기서 성과를 내면 학벌을 넘어 명문대 교수로 임용되는 ‘역전현상’이 가능해진다.

한 지방 사립대 교수는 “국내에선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가 중요하지만 외국으로 나가면 SKY 등 몇몇 대학을 제외하면 네임밸류(이름값) 차이가 거의 없다”고 귀띔했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열심히 연구해 해외 저명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케이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데는 이런 영향이 있다”고도 했다.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실적을 요구하는 채용 문화 역시 영향을 미쳤다. 최근엔 전임교원도 강의·연구·산학협력 등 다양한 트랙의 임용이 활성화됐다. 연구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분야에 따라 강의 시연, 산학협력실적 등 신임 교수에게 중점 주문하는 내용도 달라졌다.

김성동 건국대 교무처장은 “학교가 일률적으로 충원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학과에서 요청하면 교수를 채용하는데 분야마다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홍원표 처장도 “연구력이 뛰어난 사람을 주목하는 건 맞지만 전공 심사과정에서 강의능력도 본다. 심사위원 대상 공개강의, 질의응답 절차를 통해 교수로서 얼마나 짜임새 있게 내용을 전달하는지 평가해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 [교수 연공서열 깨진다(하)] 기사로 이어집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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