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연계증권(ELS)을 판매한 증권사가 중도상환 조건을 충족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기초자산 주식을 대량 매도해 이를 무산시켰다면 투자자가 입은 손해를 물어줘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이 증권사와 투자자의 이해가 충돌할 때 투자자의 이익을 우선해야 할 의무가 증권사에 있다고 판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투자자 윤모씨 등 세 명이 대우증권을 상대로 낸 상환금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8일 발표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은 위험회피거래에서의 신의칙상 주의의무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지적했다.

대우증권은 2005년 삼성SDI의 주가를 4개월마다 평가해 가격에 따라 상환금액이 결정되는 ELS를 발행했다. 중간평가일에 삼성SDI의 평가가격이 기준보다 높거나 같은 등의 조건이 충족되면 정해진 수익금을 중도상환금으로 투자자에게 주는 형태로 설계된 상품이다.

윤씨 등은 이 상품에 2억1900만원을 투자했으나 대우증권이 중간 평가일이 임박해 해당 주식을 대량 매도하는 바람에 중도상환금을 받지 못했다. 대우증권이 이 사건 중간평가일 단일가매매시간대에 삼성SDI 보통주에 넣은 매도 주문 수량은 전체의 약 79%에 달했다. 윤씨 등은 만기상환 당시 30% 상당의 원금 손실이 생기자 “대우증권이 조건 충족을 피하기 위해 주식을 고의로 대량 매도해 투자자에게 손실을 입혔다”며 소송을 냈다.

이 사건 1심과 2심은 “대우증권이 주식을 대량 매도한 것은 금융회사가 위험 관리를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델타헤지’ 거래에 해당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델타헤지는 증권사가 적정한 양의 기초자산을 보유해 옵션의 손익과 보유하는 기초자산의 손익이 상쇄되도록 하는 금융기법을 말한다.

대법원 판단은 원심과 달랐다. 재판부는 “증권사는 투자자와의 사이에서 이해상충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투자자가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대우증권이 삼성SDI 보통주를 매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험회피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것이므로 이 과정에서 투자자의 신뢰나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돼서는 안 된다”며 “대량 매도 주문을 내 조건 성취를 무산시킨 것은 투자자 보호 의무를 게을리한 것으로 신의성실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대법원은 지난달 한화증권의 ELS 상품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투자자 두 명이 낸 집단소송 신청 사건에서 이를 불허한 원심을 깨고 허가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집단소송은 판결이 나면 소송을 내지 않은 같은 사건의 다른 피해자에게까지 판결의 효력이 미치도록 한 제도다. 증권가에서는 이 상품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로열뱅크오브캐나다(RBC)가 만기상환 기준일의 장 마감 직전에 기초자산인 SK 보통주를 대량 매도해 고의적으로 조건 성취를 무산시켰다는 의혹이 나왔다.

대법원 관계자는 “ELS 상환기준일에 기초자산의 종가에 영향을 주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