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도 시작이 어렵지 한번 길이 나면 쉽게 되풀이된다.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헤프게 쓰는 것이 바로 그렇다. 한은은 어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주택금융공사(주금공)에 2000억원을 추가 출자키로 결의했다. 안심전환대출 31조7000억원을 취급한 주금공의 자본금 확충이 불가피해진 만큼 기존 주주로서 자본금을 확충하는 데 참여한다는 것이다. 한은은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편법도 썼다. 이렇게 어영부영 늘어난 한은의 주금공 출자금이 어느덧 6450억원(지분율 39.5%)에 이른다. 그냥 돈을 찍어낸 것이다.

물론 주금공 출자가 위법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2011년 한국은행법 개정 때 한은의 임무에 ‘금융안정’(1조2항)이 추가된 이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발권력을 남발한다는 점이다. 주금공 출자도 가계부채 구조개선을 통한 금융안정 도모가 명분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라면 주식시장이든, 부실기업이든 ‘금융안정’을 내세워 발권력을 동원하지 못할 곳이 없을 것이다.

발권력을 통한 증자는 국회 승인을 받아 집행하는 정부 재정투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은이 발권력으로 찍어낸 돈에는 영혼이 없고 누군가의 땀이 배어 있지도 않다. 금통위 의결만으로 통제 없이 가공의 돈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항상 남용을 경계해야 마땅하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한은에 중립성을 부여해 포퓰리즘적 정치로부터 벗어나 통화가치 유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은이 마치 마술사처럼 손쉽게 종이돈을 만들어내고, 금통위는 거수기처럼 의사봉만 두드리면 그만이라는 것인지.

한은도 발권력 동원이 내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발을 담그면 끊임없이 정부의 요구와 압력에 끌려들어간다. 주금공이 그렇고 수출입은행 출자가 그랬다. 20조원까지 불어난 금융중개지원대출도 다르지 않다. 모두 혈세를 걷어 할 일이었다. 이는 양적 완화보다 질이 나쁘다. 양적 완화조차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국채나 저당증권(MBS)을 사주는 것이 전부다. 중앙은행의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