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의 ‘묘법’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
박서보의 ‘묘법’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
'떴다방'까지 등장한 단색화 열풍…박서보 그림값 9년새 18배 급등
이탈리아 베네치아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미술의 대표 브랜드’ 단색화 전시회에는 연일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지난 7일 개막 행사에는 미국 메이저화랑 가고시안의 래리 가고시안 대표를 비롯해 영국 미술가 애니시 카프어, 다이 지캉 중국 젠다이그룹 회장 등 국제 미술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해 한국 단색화의 최근 인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지금까지 ‘한국판 모노크롬(단색으로 그린 그림)’으로 불리는 단색화는 그동안 다른 장르에 비해 저평가돼 있다가 최근 몇 년간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주목받고 있다. 이우환을 비롯해 정상화 윤형근 박서보 하종현 정창섭 김태호 등은 미니멀아트 같은 해외 사조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국 고유의 회화 양식을 창출했다. 흰색, 청색, 녹색, 암갈색 등 단색을 활용한 화면은 단순히 이미지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생명성과 힘을 녹여냈다는 점에서 서양의 사조와 다르다.

단색화 작품이 최근 국내외 전시와 아트페어, 경매를 통해 불티나게 팔리면서 가격이 올해 들어 최고 5배 이상 뛰어올랐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일본의 모노화가 세계적인 미술언어가 됐듯이, 단색화가 미술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이끌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경매시장을 중심으로 ‘떴다방’ 컬렉터들까지 등장해 지나치게 가격을 올리면서 ‘거품’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단색화 가격·거래량 모두 치솟아

올 들어 국내외 경매에서 컬렉터들의 응찰 경쟁이 이어지면서 단색화는 신기록을 쏟아냈다. 갤러리 현대의 전속작가 정상화 화백의 2005년작 ‘무제’는 지난 3월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 중국인 컬렉터에게 추정가의 3배에 달하는 488만홍콩달러(약 3억9700만원)에 팔렸다. 정 화백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이다. ‘묘법의 화가’ 박서보의 작품도 이날 464만홍콩달러에 낙찰되며 자신의 경매 최고가를 찍었다. 2006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박 화백의 작품이 3만3600달러(약 3665만원)에 팔린 것에 비하면 9년 사이에 작품 가격이 18배가량 치솟았다.

이우환의 1976년작 ‘선으로부터’는 작년 11월 뉴욕 소더비의 ‘현대미술 이브닝 세일’ 경매에서 216만5000달러(약 23억7000만원)에 팔렸다. 뉴욕 시장에서 팔린 국내 작가 작품으로는 최고가였다.

하종현의 작품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100호(160.2×130.3㎝) 크기가 점당 3000만~4000만원에 거래됐지만 최근 경매시장에서 1억4000만원을 호가한다. 단색으로 자연의 섭리를 묘사한 윤형근(1억5000만원), 닥종이를 이용해 독특한 조형세계를 개척해 온 정창섭의 ‘묵고(默考)’(8000만원), 특유의 ‘보송보송한’ 질감을 완성한 김기린(7000만원), 서예의 필선으로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이강소(5000만원)의 작품값도 1~2년 새 50% 가까이 뛰었다.

최근 국내외 컬렉터들이 단색화를 찾으면서 거래도 급증했다. 단색화 열풍이 불기 시작한 2012년부터 올 1분기까지 3년간 국내 경매시장에서 714점이 출품돼 542점이 팔려 낙찰률 80%를 기록했다. 특히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김기린 작품의 올 1분기 낙찰률은 100%에 달했다. 박서보(96%), 하종현(93%)이 뒤를 이었다.

◆‘제값 인정’이냐 ‘과열 거품‘이냐

관심의 초점은 이런 단색화의 인기가 계속 이어질지 여부다. 일부 전문가들은 단색화에 쏠린 인기는 일시적인 거품현상이 아니라 ‘투자’에서 ‘소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초저금리 시대에 미술품을 소장하려면 지금이 단색화 구입 적기라고 강조했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2012년부터 스위스 바젤, 런던 프리즈 등 세계 유명 아트페어에서 외국인의 ‘입질’이 이어지면서 국내에도 단색화 바람이 불고 있다”며 “해외 유력 미술관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만큼 당분간 작품 가격은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색화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미술평론가 윤진섭 씨는 “단색화가 꾸준히 관심을 받는 장르로 자리잡게 하려면 체계적인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며 “차세대 작가를 함께 조명하며 시대와 맥락에 따른 작품의 의미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해 9~12월 단색화 기획전을 연 미국 유명 화랑 블럼앤포는 단색화를 ‘Tansaekhwa’라고 표기하며 독립된 미술사조로 분류했다.

반면 거품이 우려된다는 시각도 있다. 김용배 예향화랑 대표는 “예술성과는 관계없이 단색화라는 이유만으로 값이 뛰고 있어 부작용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은 “(투자자들이)단색화라는 하나의 장르 중에서도 몇몇 대표 작가에만 ‘올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단색화는…구도수행하듯 형체보다 정신 강조한 그림

단색화는 1970년대 국내에서 생겨난 미술 사조다. 작가가 구도 수행을 하듯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형체보다는 정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인 김환기 이우환 곽인식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75년 일본 도쿄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이 한국 단색화의 첫 공식 기획전이다.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이 참여했고 이우환이 전시 도록 서문을 썼다. 그중 박서보는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연필로 선을 반복해 긋거나, 한지 반죽을 가지고 선을 표현하는 작품활동을 해왔다. 흰색 배경 위에 회갈색 획을 긋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동엽과 캔버스 위에 한지를 여러 장 겹치고 물감을 입히는 김기린도 단색화가로 꼽힌다. 캔버스에 일정한 색을 여러 번 덧칠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윤형근, 마대 천 뒤편에서 물감을 밀어올린 후 찍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하종현 등이 단색화 작품세계를 이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