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국가 중심 사고에 갇히면 '우물 안 개구리' 된다
미국 유럽 호주 등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 187명이 지난 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과거사를 직시하고 ‘편견 없는 청산’을 단행할 것을 촉구하는 집단 성명을 발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세계 각지의 역사학자들이 추가로 동참하면서 성명에 서명한 학자는 500명을 넘어섰다.

성명에는 허버트 빅스 미국 빙엄턴대 교수,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 피터 두스 스탠퍼드대 교수,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 등 세계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저명한 학자가 대거 참여했다. 이 중에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낸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대 명예교수도 있다. 193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공부했고 캘리포니아대와 시카고대,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다.

[책마을] 국가 중심 사고에 갇히면 '우물 안 개구리' 된다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는 이리에 교수가 ‘현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지난해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한 책을 이종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번역했다.

이리에 교수는 1990년대 이후 역사 연구의 주요 동향으로 떠오른 ‘글로벌 사관’으로 현대를 바라본다. 이 사관은 국가가 아닌 지구를 틀로 삼고, 국가 간 관계가 아닌 국경을 초월한 연계에 주목한다. “세계 전체의 틀에서 바라봐야만 역사가 존재하고, 인류의 역사는 지구에 사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연계를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인식한다. 또 지구에 사는 인간뿐 아니라 인류와 자연이 맺어온 역사를 살피는 환경사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저자는 초국가주의적(트랜스내셔널) 관점에서 현대는 언제부터이며, 근대와는 어떻게 다른지, 현대 세계에서 지구 규모로 진행되는 큰 흐름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면밀하게 풀어나간다. 그는 현대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나 냉전이 종식된 1991년 이후로 보는 기존 전통주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를 국가 단위, 강대국 중심의 권력 논리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지구 규모로 진행되는 큰 흐름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와는 달리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 사이, 나아가 인류와 자연 사이의 밀접한 연계가 인식되고, 그 인식에 기초한 생각이 일반화되고 각종 활동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현대’의 시작으로 본다. 1970년대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 기업과 비정부기구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환경과 각종 인권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90년대엔 지구적이고 국경을 초월한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 사회에 확산됐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를 현대 세계의 개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리에 교수는 한국 중국 등과 갈등을 빚는 일본의 국수적인 역사수정주의 경향에 대해 책 곳곳에서 우려를 표한다. 그는 “국가의 역사를 독선적인 해석으로 이해하고 만족하는 것은 편협한 내셔널리즘(국가주의)을 조장할 뿐”이라며 “일본인이 국가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현대의 세계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일본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 나아가 세계 전체에 현대 역사가 바람직스러운 방향으로 진행됐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글로벌한 시야를 갖지 않으면 역사 속에 고립된다”고 경고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