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페리클레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페리클레스’.
연극의 가장 오래되고 제일 앞선 의미는 ‘즐거움을 주는 놀이’다. 한영사전에서 ‘연극’을 찾으면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play’, 즉 놀이다. 놀이는 꾸며내고 흉내 내는 모방의 특성을 지닌다. 연극 무대는 모든 것을 가짜로 만들어내 보여주는 환영과 상상의 세계다. 관객은 기꺼이 가짜를 진짜로 믿고 상상할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 무대의 거짓을 보며 즐거워한다. 무대가 시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모방하기 어려워 보이는 내용을 다양한 놀이적 기법으로 그럴듯하게 형상화할 때 그 즐거움은 배가된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페리클레스’는 즐거운 예술이자 놀이인 연극의 마력에 흠뻑 취하게 한다. 셰익스피어가 말년에 지은 네 편의 로맨스극 중 첫 번째 작품을 현장감과 생동감 넘치는 풍부한 놀이성과 연희(演戱)성으로 탁월하게 무대화했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이야기를 뼈대로 삼고, 기이하고 공상적인 요소가 많은 중세시대 모험 연애담인 로맨스의 전통적 요소들로 살을 붙였다. 주인공 페리클레스가 방랑과 모험에 나서 시련과 고통을 겪은 뒤 평화와 안식을 찾는 낭만적인 사랑·모험극이다.

작품을 각색·연출한 양정웅 극단 여행자 대표는 가로 25m, 세로 35m인 토월극장 무대에 50t의 모래를 깔았다. 양 대표는 이 깊고 광활한 모래판에서 몸짓과 춤, 악기 연주 등 연희의 기본 요소부터 영상 등 첨단 기술까지 다양한 무대언어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환상적이고 재미 넘치는 극적 세계를 창조한다.

그 중심엔 모래가 있다. 배우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놀이 재료라 할 만한 모래 위에서 뒹굴고 넘어진다. 서로에게 모래를 집어 던지며 ‘사랑놀이’도 한다. 모래는 극의 주요 배경인 바닷가나 바다 자체로 활용되고, 해설자인 시인 가우어의 손에서 흩뿌려질 때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하는 모래시계가 되기도 한다. 극의 밀도를 흩트리지 않으며 적당한 강약과 템포로 조절되는 이런 놀이·연희적 요소들은 페리클레스가 죽은 줄 알았던 딸과 아내를 만나는 절정 부분의 감동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진지한 시적 대사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오랜만에 대극장 무대에 선 유인촌은 빼어난 연기와 무대 장악력으로 다소 산만할 수 있는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준다. 명배우의 부활이다.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신체 연기는 무대에 활력과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일어서서 박수를 보낼 만한 무대다. 오는 30일까지, 3만~6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