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DNA 잘라내는 유전자가위…인류, 유전자 프로그래머되다
질병 DNA 잘라내는 유전자가위…인류, 유전자 프로그래머되다
유전자가위로 DNA를 수술해 암, 에이즈, 혈우병을 치료하고 멸종위기에 처한 바나나를 구할 뿐 아니라 모기와 같은 해충을 박멸한다. 크리스퍼(CRISPR)로 불리는 제3세대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전 세계의 생명과학자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2013년 1월 필자가 포함된 서울대 연구팀과 미국 연구팀 5곳이 각각 독자적으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유전체 교정 사례를 학술지에 처음 보고했다. 이후 불과 2년이 지난 현재, 하루가 멀다 하고 이 기술을 이용한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짧지 않은 생명과학 역사에서 이처럼 이른 시간 내에 이렇게 널리 활용된 신기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이를 ‘크리스퍼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크리스퍼는 세균의 유전체에 존재하는 반복적인 DNA 서열과 이로부터 비롯된 면역체계를 일컫는 학술용어다. 세균의 천적은 바이러스다. 세균은 바이러스 침입을 받으면 바이러스 DNA를 잘게 자른 다음 그 조각을 자신의 유전체에 삽입해 둔다. 이를 크리스퍼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이 부분으로부터 작은 가이드 RNA가 만들어진 후 Cas9이라는 세균 자체의 단백질과 결합한다. 이후 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침입하면 가이드 RNA가 바이러스 DNA를 찾아내 결합한 후 Cas9이 이를 절단해 바이러스 복제를 차단한다. 다시 말해 크리스퍼는 바이러스라는 과거의 나쁜 경험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를 물리치는 세균의 면역체계라고 볼 수 있다.

생명과학자들은 최근 이를 새로운 유전자가위로 개발했다. 인간세포와 동식물세포의 유전자를 마음대로 교정하는 데 사용한다. DNA를 자른 후 세포 내 복구 시스템에 의해 다시 연결되는 과정에서 유전자 교정과 변이가 일어나는 방식이다.

크리스퍼 이전에도 제1세대 징크핑거 유전자가위와 제2세대 탈렌이 있었다. 1999년 직접 창업한 툴젠은 이들 3종 모두를 독자 개발해 사업화한 세계 유일의 생명공학 벤처기업이다.

그러나 징크핑거와 탈렌은 만들기가 어렵고 가격이 비싸 널리 활용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가이드 RNA만 교체해 Cas9 단백질과 함께 세포로 전달하면 되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이를 이용하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부분을 수술해 원상 복구할 수 있고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잘라내 제거할 수도 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버그를 발견해 수정하듯이 생명과학자들이 손쉽게 인간 및 동식물의 유전자를 마음대로 리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수십억년 동안 유전자의 진화를 거쳐 탄생한 인류가 이제 유전자의 프로그래머가 된 것이다.

새로운 혁명적 기술이 가져 올 인류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유전질환을 치료하는 목적에 그치지 않고 외모, 성격, 지능 등을 개선하는데 남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 연구진이 최초로 인간 배아에 유전자가위를 도입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 기술이 무절제하게 동식물에 활용돼 생태계를 파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같은 문제는 앞으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풀어내야 할 숙제라고 볼 수 있다.

■ RNA

핵산의 일종으로 유전자 본체인 디옥시리보 핵산(DNA)이 가지고 있는 유전정보에 따라 필요한 단백질을 합성할 때 직접 작용하는 고분자 화합물이다.

김진수 서울대 교수는

1999년 생명공학 벤처기업 툴젠을 공동 설립했고 2005년에는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2013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 대한 논문을 처음 발표해 세계 과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진수 < 서울대 화학부 교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 체교정 연구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