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서만 매년 100만부 찍어내…가계부는 살아있다
이 책자로 말하자면 매년 100만부가 찍히는 ‘밀리언셀러’다. 2012년 출판된 만화 ‘미생’이 2년 만에 100만부 팔렸으니 이를 능가하는 인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엔 페이지마다 요리법과 캠핑장 등 생활정보도 실려 있다. 그리고 공짜다.

농협에서 만든 가계부 얘기다. 매년 연말 마트와 은행, 농촌의 단위농협에서 배포된다. 100만부씩 찍어낸 지 20년이 넘었다. 작년까지 가계부 제작을 맡았던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요즘 누가 가계부를 쓰냐고 하지만 의외로 꼭 찾는 분이 있다”며 “그래서 수량을 못 줄인다”고 말했다.

예전엔 은행이나 보험사마다 가계부를 만들었다. 고객 선물이나 홍보 차원에서였다. 아직도 가계부를 제작하는 곳은 농협과 한국은행, 일부 보험사 정도다. 매년 11월쯤 배포돼 연말이면 품귀 현상을 빚는다. 자신이 구한 가계부를 인터넷 중고거래 게시판에서 7000~8000원 웃돈을 받고 파는 사례도 있다.

가계부는 이름 그대로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을 적는 장부다. 고수들은 씀씀이의 세부 용도를 분류해 돈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다. 직접 손으로 쓰고 계산해야 하니 번거롭다. 그럼에도 가계부는 오랫동안 살림살이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농협서만 매년 100만부 찍어내…가계부는 살아있다
1960~1970년대 정부는 가계마다 푼돈을 모아 자립하자며 저축을 독려했다. 1962년 마이너스였던 가계순저축률(세금 등을 내고 가계가 쓸 수 있는 소득에서 소비하고 남은 금액 비중)은 꾸준히 올라 1988년 24.7%에 달했다. 알뜰살뜰하게 살림하면 돈이 모이던 시절, 가계부의 황금기였다.

1997년 외환위기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당시 신문을 보면 ‘기업부도를 겪었으니 가계소비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거나 ‘씀씀이와의 전쟁’ ‘충동(구매)과의 전쟁’ 식의 표현이 잦다. 그해 12월 여성단체협의회 조사 결과 750명의 주부 가운데 56.3%가 가계부를 쓰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쓰지 않는 이유는 비슷했다. 매일 적자라서 가계부 쓰다보면 화가 난다거나, 매일 지출 규모가 비슷해 귀찮다는 것이었다.

이젠 가계부 쓰는 사람을 더욱 보기 힘들다. 맞벌이가 늘었고 젊은 부부들은 각자 돈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시대에 일일이 손으로 쓰는 것은 특히 불편하다. 요즘은 가계부 역할을 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도 여럿 나와 있다.

절약이 미덕이던 시절은 지나갔다. 가계순저축률은 2000년부터 한 자릿수를 넘어본 적이 없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금리가 예전보다 하락해 저축 유인이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가계 소비 성향은 제자리다. 연금과 세금 등 매달 나가는 돈이 많은 데다 노후 준비도 해야 하니 다들 허리띠를 졸라맨다.

돈 모으는 재미가 줄었다지만 그래도 가계부를 찾는 사람이 있다. 농협 관계자는 ‘가계부 마니아’가 많다고 했다. “2013년엔 신용카드 지출 내역을 쓰는 난을 줄여봤어요. 스마트폰으로 카드 쓴 내역이 날아오니까 상세히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매년 똑같던 걸 왜 바꿨느냐’는 항의전화가 끊이지 않았죠. 결국 예전 형식으로 되돌렸습니다.”

가계부 쓰는 사람들은 취향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인터넷 후기를 보면 농협 가계부는 생활정보가 많아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한국은행 가계부는 군더더기 없고 단순하다(표지는 별다른 디자인 없이 5만원권의 신사임당 그림). 교보생명 가계부는 디자인이 세련돼 젊은 여성이 찾는다고 한다.

지난해 가계순저축률은 6.1%로 조금 올랐다. 여전히 한 자리지만 그래도 2004년(7.4%) 이후 최고치다. 저축이 늘면 향후 경기가 좋아졌을 때 소비의 힘이 커진다. 가계부가 새로운 씀씀이 내역으로 가득찰 날이 언제 올까.

김유미 경제부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