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화 약세 가속화 > 원·엔 환율이 23일 오전 한때 100엔당 900원 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엔화 약세가 가속화됐다.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서 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 엔화 약세 가속화 > 원·엔 환율이 23일 오전 한때 100엔당 900원 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엔화 약세가 가속화됐다.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에서 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국내 산업계에 엔저(低) 경보가 울렸다. 2012년 초 100엔당 1500원대였던 원·엔 환율은 쉼 없이 내려 23일 한때 800원대에 진입했다. 3년 새 원화가치는 엔화 대비 40% 치솟았다. 수출기업들엔 충격파가 간단치 않다. 한국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은 원·달러 환율보다 원·엔 환율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까지 제3국 시장에서 일본 제품에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원·엔 동조화 깨졌다

[엔저 초비상] 무너진 엔저 방어선…삼성전자마저 "원가 15% 줄여야 日과 경쟁"
외환시장에선 ‘100엔당 900원 선’을 외환당국의 최종 방어선으로 여겨왔다. 지난해 원화가치가 급등하자 기획재정부는 ‘원·엔의 동조화’를 강조했다. 달러와 비교한 원화가치가 엔화가치와 비슷하게 움직이도록 달러 매수 등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후 원·엔 환율은 100엔당 910~950원대를 유지했다. 이는 엔저 속도를 늦췄다. 시장에서도 ‘외환당국이 100엔당 900원 선은 깨지지 않게 할 것’이란 믿음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엔 외환당국 의도대로 원·엔 환율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달러가 약세로 전환하면서 지난 한 달간 원화가치는 달러 대비 4.6%(22일 기준) 올랐다. 이달 들어선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순매수하면서 원화가치 상승폭이 더 컸다. 이 기간 엔화가치는 달러 대비 1.3% 오르는 데 그쳤다. 원화가치가 엔화보다 더 크게 오르면서 23일 100엔당 900원 선이 깨진 것이다.

◆세계 최강 반도체도 엔저 걱정

산업계는 이미 비상이다. 엔저에 힘입어 일본 경쟁업체들의 가격경쟁력은 크게 회복됐다. 시장조사업체 위츠뷰에 따르면 2013년 출하량 기준 세계 TV시장 4위였던 소니는 지난해 중국 TCL을 제치고 삼성전자, LG전자에 이어 3위로 한 단계 올라섰다.

한국이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메모리 반도체도 무풍지대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일본 도시바와 경합 중인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엔저를 등에 업은 도시바의 가격 인하 공세를 우려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달러당 엔화가치가 2013년 초보다 30% 떨어진 만큼 일본 업체가 제품 가격을 15%가량 낮출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며 “삼성이 지금보다 원가 경쟁력을 15%가량 높여야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업체도 마찬가지다. 미국 자동차 시장조사업체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미국에선 현대자동차의 주력 차종인 쏘나타 2400㏄급이 최저 2만471달러, 경쟁 관계인 도요타 캠리 2500㏄급이 최저 2만350달러에 팔려 가격 차이가 거의 없다.

일본 업체와 경쟁이 심한 자동차 부품업계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올 1분기 자동차 부품 수출은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4.7% 감소했다. 1분기 기준으로 자동차 부품 수출이 줄어든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6년 만에 처음이다.

◆석유화학 철강이 먼저 충격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원·엔 환율이 100엔당 연평균 900원일 때 석유화학 수출은 작년보다 13.8%, 철강은 11.4%, 자동차는 7.6%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공급 과잉에 직면한 석유화학과 철강 부문은 일본과의 수출 경쟁도 치열하다.

전문가들은 원·엔 환율의 추가 하락폭은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홍석찬 대신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외환당국이 엔저 영향을 주시하고 있는 데다 연기금도 달러 매수에 나서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올해 안에 미국의 금리 인상이 본격화하면 원화가치가 다시 하락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김유미/주용석/강현우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