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맥락을 읽지 못하면 정보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세상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책마을] 맥락을 읽지 못하면 정보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 도입부에 등장하는 대사다. 누군가로부터 대뜸 이런 말을 들었다면 코웃음부터 나올 법한 가설이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사례를 접하고 맥락을 파악하게 되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영화는 9·11 테러 희생자들의 마지막 말을 소개한다.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하는 순간 승객들이 전화로 전한 마지막 메시지는 모두 증오나 복수가 아닌 사랑의 메시지였다.

평소 ‘사랑한다’는 말과 추락 직전 ‘사랑한다’는 말은 무게와 의미가 다르다. 가설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특정 현상을 맥락과 함께 제시하는 사례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다.

정보 홍수 시대에 조직과 사회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정보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쏟아지는 정보 중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례를 선별하고 그 맥락과 인과관계를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 사례를 다각도로 관찰해 유용한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분석력을 요구한다.

이노우에 다쓰히코 와세다대 상학(商學)학술원 교수는 《왜 케이스 스터디인가》에서 맥락을 읽는 실천적인 훈련방법으로 ‘케이스 스터디(사례연구)’에 주목한다. 이노우에 교수는 “사례연구는 단 하나의 사례를 제대로 선택하고 깊이 파고들어가 차별성과 시사점을 발견하는 데 최적화된 방법”이라며 “수식이 난무하는 난해한 연구와 달리 관점만 이해하면 실무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례연구의 강점으로 ‘세 가지 힘’을 든다. 인간의 지성을 활성화하고 사고력과 관찰력을 이끌어내는 힘, 복잡한 현상에 대응하는 인과관계를 밝히는 힘,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서 구조적인 유사성을 찾아내 이해와 발상을 촉진하는 ‘유추법’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다.

저자는 사례연구의 이런 힘을 잘 보여주는 다섯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모두 미국 경영학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미국경영학회(AOM) 최우수논문상’을 받은 논문이다. △돈데 플로먼 텍사스대 교수팀의 급진적인 조직 혁신에 관한 연구 ‘쓰러져가던 교회의 예상치 못한 부활극’ △클라크 길버트 하버드대 교수의 조직의 관성 변화에 관한 연구 ‘디지털화의 충격, 살아남은 신문사의 조건’ △이완 펄리 킹스칼리지 런던 교수의 혁신 전파에 관한 연구 ‘의료 혁신을 가로막은 보이지 않는 벽의 발견’ △킴벌리 엘스바흐 캘리포니아대 교수·로드릭 크레이머 스탠퍼드대 교수의 창의성 평가에 관한 연구 ‘창의적 작가를 발굴하는 할리우드 스피치의 비밀’ △멜리사 그래브너 텍사스대 교수의 인수합병(M&A) 의사결정 과정에 관한 연구 ‘M&A 협상에 나타난 신뢰의 비대칭성’ 등이다.

소개된 논문은 특정 사례에서 각각 조직 혁신, 위기관리, 인재 채용, 혁신 전파, M&A 등 경영의 핵심 의제를 도출하고 세밀한 설계와 깊이 있는 분석으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은 최고 수준의 연구들이다. 교회, 신문사, 할리우드 제작사, 병원 등 다양한 조직의 사례를 통해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조직 내 소통과 변화관리자가 중요한 까닭, 현장에서 힌트를 얻는 방법 등 조직의 변화와 혁신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는 딱딱하고 어려운 전문 용어를 배제하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흥미로운 사례를 더해 각 논문의 주제와 핵심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저자는 논문의 내용뿐아니라 연구자들이 주제에 접근하고 조사·연구하는 방법론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각 논문은 언뜻 보기에 평범하거나 우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을 파고들어가 중요한 발견을 이룬 연구들이다. 평범한 사건에서 중요한 변화의 기류를 탐지해내고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사례연구의 힘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학술 세계가 아닌 실무 세계에서 사례연구를 응용할 수 있는 활용 지침도 꼼꼼히 소개한다. 분석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가장 적절한 관찰대상을 설정하고, 예상되는 오류를 피해 신중하게 조사를 설계하며, 결과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검증 과정을 마련하는 사례연구의 방법론은 실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방법론이다.

저자는 “진실의 규명, 보편적인 진리의 발견을 추구하는 학술 분야와 달리 실무에선 시의적절한 판단의 재료를 제공하고 회사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확실함보다는 속도를 중시해 빠르고 간소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을 감수한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오피니언 리더의 일반적인 소양으로서 사례연구를 배워보고 싶은 사람에게 반가운 저작”이라고 평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