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중림동 사람들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김재찬이 어느 날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댔다. 어머니 윤씨가 이유를 묻자 청나라가 은 5000냥을 보내라는데 마련할 길이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윤씨는 약현(藥峴)의 옛집으로 그를 데려가 부엌 바닥을 파 보라고 했다. 그 속에서 은이 가득 든 독 세 개가 나왔다. 윤씨는 옛날 집을 수리하다 은독이 나오자 뜻하지 않은 횡재는 이롭지 못하다며 다시 묻어두었다고 말했다. 그 은으로 근심을 덜자 왕은 윤씨를 ‘정승부인’이 아니라 ‘부인정승’으로 예우했다.

이 얘기에 나오는 약현이 서울 중림동이다. 김재찬의 아버지 김욱도 영의정을 지냈기에 부자(父子)정승 마을로 불렸다. ‘용재총화’의 저자이자 성종 때 대제학을 지낸 성현도 이곳에 살았다. 그의 호를 딴 ‘허백당’터가 남아 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도 여기에 살았다. 약현성당 앞에 그의 기념비가 있다.

중림동은 약초가게가 많아 약밭고개(약현)로 불린 약전중동(藥典中洞)과 한림동(翰林洞)의 글자를 하나씩 따 붙인 것이다. 한림동은 선조 때 명신 이정엄·정형·정겸 삼형제가 모두 글을 잘해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만리재는 세종 때 부제학을 지낸 최만리가 살았던 곳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대한제국 때 이완용이 살던 집은 지금의 중림동주민센터 자리에 있었다. 1907년 고종 퇴위 때 반일단체 동우회(同友會) 회원들의 습격으로 불타버렸지만, 이 집에서 그는 10리가 넘는 삼청동의 양아버지 집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인사를 다녔다고 한다.

인근의 양정고보 자리에는 손기정공원이 있다. 손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우승 뒤 히틀러에게서 받아온 월계수 나무도 자라고 있다.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의 1인자로 꼽힌 조창조 등 숱한 ‘주먹신화’가 탄생한 곳도 이곳 중림동 시장이다.

철길 옆 서소문 공원은 천주교 성지다. 신유박해 때 정약용의 셋째형이자 이승훈의 처남인 정약종이 순교했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등 수많은 교인들이 참수를 당한 곳이다. 그 자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약현성당이 있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 살던 집터도 성당에서 가깝다.

오랜 영욕의 세월만큼이나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인물들의 사연도 갖가지다. 그 숱한 이야기가 모여 지금의 역사를 이뤘다. 중림시장에는 오늘도 새벽 장꾼들이 몰려든다. 그 왁자한 시장통의 한가운데로 한국경제신문 기자들이 총총거리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