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자신의 정견을 밝혀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도, 상대방을 반박하거나 설득하는 것도 결국 말로 하는 일이다. 정치인이 모여 있는 국회에서는 매일 수많은 말이 쏟아진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명연설이 나오기도 하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독설도 나온다.

국회 본회의와 16개 상임위원회, 특별위원회(현재 12개) 등 회의에서 나온 말들을 빠짐 없이 기록해 국민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역사에 남기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의장 가운데에 앉아 국회의원의 말을 받아 옮기는 현대판 사관(史官), 국회 속기사다. 이 역사의 현장을 반세기 가까이 지켜온 노장이 있다. 김학순 국회 의정기록과 주무관(60)은 1974년부터 41년간 근무한 최고참 속기사이자 현역 최장수 국회 공무원이다. 국회의원 선수(選數)로 따지면 9대부터 19대까지 11선에 해당하는 경력이다. 김 주무관은 “직접 기록한 회의만 1000번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퇴임(6월30일)을 두 달여 앞둔 그를 17일 국회에서 만났다.

암호 같은 속기부호, 한자와 씨름

지금도 그렇지만 40여년 전에도 국회 공무원이 되려면 ‘좁은 문’을 통과해야 했다. 김 주무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인 1973년 형부의 권유로 국회 부설 속기사양성소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1년간 속기를 배우고 나면 국회 속기사 공채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경쟁률이 10 대 1을 넘었다. 김 주무관은 “지원자가 120명이 넘었는데 합격한 사람은 10명이 채 안 됐다”고 회고했다.

요즘은 ‘카스’라고 하는 속기용 타자기가 있지만 과거에는 손으로 회의 내용을 일일이 적어야 했다. 말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속기부호’를 사용했다. ‘ㄱ’은 왼쪽 아래 45도 방향의 짧은 선으로, ‘ㄴ’은 수평 방향의 짧은 곡선으로 표시하는 식이다. 부호로 표시한 것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고쳐 쓰는 작업이 필요했다. 회의가 끝나면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옮겨 써야 했으니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늦게까지 일하다 통금시간을 넘겨 집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속기사들의 가방엔 암호 같은 속기부호가 가득 찬 노트가 들어 있어 경찰 검문 과정에서 간첩으로 오해받은 일도 있었어요.”

속기는 단순히 받아 적는 일이 아니다. 속기를 제대로 하려면 국회에서 논의하는 다양한 주제에 관해 상식을 갖춰야 하고 맥락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예전엔 한자도 70~80%나 섞어 썼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계속 공부했어요. 시사 상식을 갖추기 위해 신문 사설을 따라 써보는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자 공부도 많이 했죠.”

“진심 담긴 연설 땐 눈물”

[人사이드 人터뷰] "신사 김종필 전 국무총리…요점 잘 파악해 논리정연"
오랜 시간 국회의원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만큼 김 주무관에겐 기억에 남는 정치인이 많다. 가장 인상적인 국회의원이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라고 답했다.

“김 전 총리는 국회의원 시절에 매우 신사적이었고 요점을 잘 파악해 논리정연하게 말했어요. 상대 당에서 공격적인 발언을 해도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아무래도 속기사들은 차분하게 얘기하는 국회의원을 좋아하죠. 잘생겨서 여자 속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본인이 발언한 원고를 속기사에게 전달하는 의원도 있었다. "이상수 전 의원의 경우 의원 시절 단상에서 발언하고 나면 원고를 꼭 속기사에게 갖다줬어요. 기록하느라 애먹지 말고 본인이 작성한 원고를 참고하라고 배려한 것이죠.” 현역 국회의원 중에선 어떨까. “후배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니 심윤조 새누리당 의원이 발언 내용이나 목소리, 매너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반면 속기사를 힘들게 하는 국회의원도 있다. 발음이 불분명하고 말을 너무 빨리 하거나 사투리가 심한 국회의원이다. 회의장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딴청을 피우는 국회의원도 속기사에게는 ‘비호감’이다. 상임위 소위원회 등 참석자가 적은 회의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한다.

“회의 중에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과자를 먹는 국회의원도 있었어요.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속기사도 집중이 잘 안 됩니다. 상임위 회의에 들어가 보면 여야 간 논쟁이 격렬해질 때가 있는데 위원장이 중재를 못해 회의 진행이 매끄럽지 않을 때도 힘들죠.”

국회의원의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박선영 전 자유선진당 의원이 탈북자 강제 송환에 반대하면서 단식하다가 국회에 나와 힘없는 목소리로 탈북자 북송 반대 결의안을 발표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진심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태평로 국회’ 시절부터 일해

김 주무관은 ‘태평로 국회’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한 현역 국회 공무원이기도 하다. 그가 국회에 취직한 이듬해인 1975년 국회는 지금의 자리인 여의도로 옮겼다. 국회의사당의 상징인 원형 돔의 색깔이 처음에는 구릿빛이었다고 한다. 소재가 청동이다 보니 세월이 지나 빛이 바래면서 지금과 같은 연청색이 된 것이다. 원형 돔의 색이 바랜 만큼 국회 안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발언이 제한적이었어요.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부를 함부로 비판할 수 없었죠.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국회의원들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됐죠. 경제 문화 등 정치 이외 분야에 대한 논의도 늘어났습니다. 요즘은 당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얘기하는 국회의원도 많아졌어요.”

김 주무관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회의원의 모습에 실망한 적이 많다. 정쟁에 몰두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막말을 서슴지 않고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까지 쓸 때다.

“여당이 안건을 단독 처리하기 위해 회의실 문을 잠갔는데 야당 의원들이 문을 망치로 부수고 들어간 일도 있었고 김선동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며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렸죠. 그땐 속기를 중단하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어요.”

김 주무관은 국회의원의 긍정적인 면을 봐줄 것을 당부했다. “국민의 눈에는 국회의원들이 일은 안 하고 싸움만 하는 것으로 비쳐지죠.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면 상당수 국회의원이 아주 열심히 일해요. 말하는 것을 적다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진심을 담아 얘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국회 속기사의 세계
한글속기 3급 자격증 필수…지난해 경쟁률 58 대 1


속기사는 국회, 지방의회, 법원, 검찰 등 다양한 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발언을 기록하는 국회 속기사는 ‘속기사의 꽃’으로 불린다.

국회 속기사가 되려면 국회 9급 공무원 채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학력 제한은 없지만 만 18세 이상, 한글속기 3급 이상 자격증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다. 국회 속기사는 공무원으로서 신분을 보장받고 일반직 공무원과 승진 기회가 같아 지망하는 수험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지난해 국회 속기사 공채 때 5명 모집에 291명이 지원해 58.2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국회에서 활동 중인 속기사는 80명이다. 이들은 국회 본회의와 담당 상임위원회, 상임위 산하 소위원회에 들어가 참석자들의 발언을 기록한다. 국회의장이 주최하는 간담회에도 속기사가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한다. 국회가 열리는 기간이 예전보다 길어져 속기사의 업무도 많아졌다. 또 2004년까지는 본회의와 상임위만 회의록을 만들었지만 2005년부터는 상임위 소위원회도 회의록을 작성하고 있다.

속기사가 정리한 회의 내용은 국회 내부 전산망에는 약 2시간 후,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국회 회의록 홈페이지(http://likms.assembly.go.kr/record)엔 3일 후에 공개된다. 국회 회의록은 명백히 잘못 기재된 내용에 한해서만 당사자의 수정 요구에 따라 고칠 수 있다.

속기사들은 ‘카스’ ‘소리자바’ 등 속기 전용 타자기를 사용한다. 이 타자기는 일반 컴퓨터와는 키보드 배열과 입력 방식이 다르다. 가령 ‘국’자를 입력할 때 ‘ㄱ→ㅜ→ㄱ’ 순으로 치는 게 아니라 세 개의 자·모음을 동시에 입력할 수 있다. 말하는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다. 정순화 국회 의정기록과 서기관은 “속기사는 기술적 숙련도는 물론 자신이 기록하는 분야에 대한 지식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전문직”이라고 말했다.

박종필/유승호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