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자본주의 오해와 진실’을 연재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오해는 뿌리 깊습니다.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시장경제는 탐욕스러우며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대량 실업을 낳을 뿐이라는 주장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을 무시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서 비롯됐습니다. 시장경제 또한 탐욕의 확대 재생산이 아니라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탁월한 경제질서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이런 오해와 진실을 탐구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한 이론적 징검다리를 놓아드릴 것입니다.
[세계 경제사] 극빈층 제대로 보호 못하면서 중산층 이상 복지 확대 곤란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21세기 초의 대한민국 경제사를 쓴다면 어떻게 서술할까. 복지가 시대정신이 된, 그래서 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시기라고 정의할 게 틀림없다. 지난 10여년간 의료, 연금, 교육, 보육 부문 등에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복지정책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부의 복지 확대가 돌이킬 수 없는 국민정서가 됐다. 어린애를 키워주고 학교에 보내주며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병도 치료해주고 늙으면 보살펴주는 등 행복 증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복지국가야말로 문명의 상징이요 번영의 열쇠라는 미신까지 생겨났다.

[세계 경제사] 극빈층 제대로 보호 못하면서 중산층 이상 복지 확대 곤란
극빈자를 위한 국가의 복지정책은 필요하다. 시장은 복지의 최대 산실이지만 빈곤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치료해도 아픈 사람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처럼 극빈자도 부단히 생겨나기 때문이다. 빈곤자를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만 맡길 수도 없다. 기부문화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정책이 없으면 ‘송파 세 모녀’처럼 자살하거나 굶어 죽을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밀턴 프리드먼이 실토했듯이 가난의 실상을 보면 참 가슴 아프고 괴롭다. 1인당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굶어 죽거나 자살할 빈자가 많다면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극빈층을 보호하는 ‘선택적 복지’가 복지원칙이 돼야 한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이를 구현한 게 ‘기초생활보장법’이다. 허술하지만 이 제도가 한국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마저 없다면 굶어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다. 이 제도를 수선해 제대로만 시행한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밝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중한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면서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국가의 복지를 확대(보편적 복지)시킬 필요가 있을까.

안타까운 건 그런 복지 확대를 단순히 돈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금과 복지의 연계론’이 대표적이다. 이를 잘 표현한 게 영·미의 ‘저부담-저복지’, 독일의 ‘중부담-중복지’, 스웨덴의 ‘고부담-고복지’ 공식이다. 그러나 정부의 복지 확대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돈이 많거나 돈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정부의 복지를 늘려선 안 된다. 복지 확대는 원칙의 문제요 국가철학, 경제윤리의 문제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간섭주의를 옹호하는 연계론은 반쯤 틀린 게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

정부의 복지 확대는 세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복지 확대는 결코 국가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둘째, 인격 존중, 독립심, 자기 책임, 기업가 정신, 가족 등 고귀한 경제윤리의 파괴를 부른다. 셋째, 높은 부담은 높은 복지가 아니라 낮은 복지를 부른다는 ‘복지의 역설’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건 복지국가의 산물인 사회권(社會權·social right)이다. 이는 급식, 보육, 교육 등 원하는 것을 지급해줄 것을 타인(납세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란 개념이다. 한 개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게 건전한 정부가 할 도리인가.

[세계 경제사] 극빈층 제대로 보호 못하면서 중산층 이상 복지 확대 곤란
복지국가는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는 장치도 없다. 그래서 시장이 할 일을 제멋대로 빼앗아 ‘권리의 과잉’을 초래했다. 급식, 건강, 교육 심지어 각종 산업보조금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사회권이 아닌 게 없다. 그래서 사회권의 입법은 법치와도 정면으로 충돌하고 공법이 사법을 괴롭히는 ‘법의 타락’을 초래한다.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야심 찬 복지국가는 필연적으로 폭정을 부르고 그 결과는 경제자유의 유린으로 나타난다. 국민행복(복지)은 결코 국가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칸트의 인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무상 보육·급식, 국가 독점의 연금·의료보험처럼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까지 복지를 확대하는 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부자도 정부의 복지에 의존하는 걸 선(善)으로 여기는 사회를 정의사회라고 말하는 건 말장난이다. 개인의 삶을 국가가 책임지기에 자신과 가족에 대한 책임윤리가 훼손된다. 독립심을 갉아먹고 복지 의존심만 강화하고 절약, 인내심, 기업가 정신 등 개인과 사회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덕목도 위축시킨다.

보편적 복지는 윤리의 문제라는 것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돈이 많은 정부의 복지 확대가 자기책임, 독립심, 진취성, 절약 등과 같은 열린 사회의 도덕을 파괴한다면 그런 복지는 지속 불가능하다. 그런 문제는 ‘자원의 저주’라는 말이 잘 설명해준다. 과거 네덜란드처럼 갑자기 나온 석유로 번 돈을 정부가 복지 확대에 이용한 결과 생산활동 대신 의미 없는 소비활동 추구, 노동의욕 감소, 자기책임 상실 등으로 경제가 추락했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재정건전성이 복지 확대 여부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재정이 건전하다고 해서 정부가 복지를 확대하면 필연적으로 도덕적 타락과 이에 따른 경제 성장의 추락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올리면 더 행복해진다는 ‘고부담-고복지’도 틀린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복지 확대로 복지 수혜자 측에서 생겨날 일할 의욕, 책임감 등 도덕의 손상과 다른 한편으론 조세 부담으로 기업의 투자 위축, 일할 의욕 상실로 인해 성장이 저하되면서 실업과 빈곤층의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재정 낭비도 복지국가의 심각한 문제다. 복지예산은 주인 없는 돈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복지예산의 남용과 낭비를 뜻하는 ‘공유의 비극’은 그래서 당연한 결과다. 증세를 통한 복지 확대가 결국 복지 수준을 낮춘다는 ‘복지의 역설’은 복지국가 현실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선택적 복지의 부담이 낮다고 해서 시민들이 누릴 복지 수준이 낮아지는 게 아니다. 개개인이 시장에 의존해 복지를 증진하려는 강력한 의욕 때문이다. 정부가 할 일은 무의탁 노인, 결손가정, 당장 먹을 게 없는 어려운 가정을 돕는 선택적 복지여야 한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