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대표가 27일 서울 서교동 밤과 음악사이 홍대점에서 자신이 수집한 LP들을 들어보이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김진호 대표가 27일 서울 서교동 밤과 음악사이 홍대점에서 자신이 수집한 LP들을 들어보이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中企CEO 안부러운 술집 사장
90년대 음악 감성주점 ‘밤사’, 전국 20여지점서 300억 매출
음악틀면 손님들은 테이블서 춤

고교땐 야구선수 꿈꿨던 DJ
부모 세상 떠나 가세 기울자 상경…나이트DJ 거쳐 김건모 로드매니저로
음반 제작사업으로 히트 쳤지만 MP3에 밀려 사업정리 후 술집

3040 놀이터 만드는 게 꿈
20대는 클럽, 50대는 뽕짝
갈곳없던 3040세대에게 LP로 음악 들려줬더니 ‘발길’
손님들 신나게 놀다 갔으면…


주말마다 서울 홍익대·강남역·건국대 등 번화가에 가면 30~40대가 한 가게 앞에 수백미터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쓰던 작은 나무 책상이 늘어서 있고, 한쪽 뮤직박스에서는 DJ가 LP로 1980~1990년대 추억의 노래를 튼다. 015B의 발라드 곡에 맞춰 손님들이 ‘떼창’(다 같이 노래 부르는 것)을 하고, 클론의 댄스 곡이 나오면 모두 테이블 사이로 나와 춤을 춘다.

‘밤사 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인기를 끌어 ‘현대판 고고장’으로 통하는 1990년대 음악 감성 주점 ‘밤과 음악사이(밤사)’ 얘기다. 현재 전국 13개 지역에 20여개 지점, 한 해 매출은 250억원에 달한다. 오너인 김진호 밤과음악사이 대표(47)는 밤마다 책상 대신 테이블 한 구석을 지키며 손님들과 술잔을 부딪친다. 고급 술과 안주 하나 없는 주점을 웬만한 중소기업 부럽지 않은 회사로 키워낸 비결은 뭘까. 그는 “‘딴따라’ 하며 놀아본 사람이 남들을 잘 놀게 만들 줄도 안다”며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풋내기 DJ

김 대표는 나이 터울이 큰 형들 밑에서 막둥이로 자랐다. 자연스럽게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영화를 보는 대신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를 즐겨 들었고, 동요 대신 산울림의 ‘아니 벌써’를 흥얼거렸다. 남들이 공부할 때 음악 테이프를 돌려가며 맘에 드는 가사를 받아 적었다.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형들을 따라 자연스레 대중문화 음악을 접했다”며 “음악에 관한 한 조숙한 ‘애늙은이’였다”고 회상했다.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으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중학생 때 세상을 등졌다. 가세가 기울어 학비를 내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김 대표는 스무 살이 되던 해 홀로 상경했다. 아는 것이라곤 어렸을 적 즐겨 듣던 음악뿐이었다. 김 대표는 “마침 서울 번화가에 나이트클럽이 속속 들어서며 인기를 끌고 있었다”며 “DJ로 한 번 성공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고 돌이켰다.

5만원을 겨우 모아 중고 턴테이블과 앰프를 구입한 게 시작이었다. DJ용 전문 믹서가 비싸 싸구려 스피커를 이어 붙여 썼다. 장비는 열악했지만 열정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종로2가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막내 DJ로 일을 시작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도 잠 안 자고 연습했어요. 어떻게 하면 재밌게 음악을 틀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종일 했죠. 연습벌레로 살다 보니 기회가 찾아오더군요.”

김 대표의 이름이 DJ업계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의 메카였던 강남 주변 클럽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이 빗발쳤다. 씨에스타 월드팝스 스튜디오 유니콘 등 당시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클럽은 한 번씩 다 거쳤을 정도였다. 1990년대 초부터 DJ협회를 만들어 괜찮은 신곡들을 전국에 배급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전국 DJ들이 모여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에서 한꺼번에 트니 한 번 마음 먹었다 하면 무조건 히트곡이 됐지요. 저희가 고른 노래들이 지금 다 90년대 주요 인기곡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하.”

90년대 음악사를 함께 쓰다

[人사이드 人터뷰] 김진호 대표 "서태지 노래에 손님들 떼창…'밤사'엔 갑을도, 나이도  없죠"
뒷골목을 주름잡던 김 대표는 이후 대중음악 업계에 뛰어들었다. 1992년 당시 선배 DJ였던 김창완 씨로부터 ‘새로 데뷔하는 가수 매니저를 한 번 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게 계기였다. 지금은 전 국민이 다 아는 가수 김건모였다. 김 대표는 “6개월간 DJ 일을 접고 김건모의 로드매니저로 일했다”며 “‘너에게 원한 건’과 같은 히트곡이 나오면서 보람을 느꼈고 이후 음반 제작자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감이 좋아 손을 대는 음반마다 어느 정도 히트했다. 김 대표는 “제작에 관여한 앨범만 200여장이고, 총 1000만장이 팔렸을 것”이라며 “특히 클럽에서 틀던 인기 음악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클럽DJ가요리믹스’는 11집까지 발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 김민종·애즈원 등의 가수가 속한 기획사 경영에 뛰어들어 신인 뮤지션들의 음반을 직접 기획했다. 럼블피쉬 데뷔 음반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서 빛을 봤다. 리쌍 1·2집에는 자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얼마 가지 않았다. 무료 MP3 음악이 널리 보급되면서 음반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다 불법 다운로드로 음악을 ‘도둑질’하는데, 1만원짜리 앨범을 만드는 데 이렇게 힘을 쏟을 이유가 있나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음악에 대한 미련은 많았지만, 다 정리하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놀아 본 사람이 노는 판도 잘 깔죠”

업계를 떠난 김 대표가 뒤를 돌아본 것이 ‘밤사’의 시작이었다. 젊은이들은 클럽을 향하고, 50대 이상은 ‘뽕짝’을 들으러 갔지만 중간에 낀 30, 40대는 갈 곳이 없었다. 편안하게 옛 노래를 들으며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할 곳이 필요했지만 마땅치 않았다. 김 대표는 사업을 정리하며 남긴 음반 수익으로 서울 한남동에 망한 가게 하나를 사들였다. 당시까지 수집한 수만장의 LP판을 한데 모아놓고 추억의 노래를 틀며 동료들과 소주를 마셨다. 단돈 1만원, 2만원에 술과 안주를 먹으며 음악과 추억을 곁다리 안주로 삼는 공간이었다. “말 그대로 밤에 모여 김현식이나 김광석 음악을 들으며 ‘밤과 음악사이’에서 향수를 즐기는 작은 가게였어요. 1980~1990년대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술집처럼 말이죠.”

그렇게 시작한 ‘밤사’는 갈 곳 없던 3040세대의 발길을 끌어 모았다. 전국 각지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다. 김 대표는 사업을 좀 더 확장하기로 하고 2008년 홍대 앞에 2호점을 냈다. 간판은 DJ 시절 인연을 맺은 클론의 구준엽 씨 도움을 받았다. 구씨는 나름 디자인 감각이 있었다. 입구 벽면에는 김 대표 자신이 일했던 10여개의 나이트클럽 이름을 적었다. 김 대표는 “LP 모양 종이에 안주판을 만들었고, 단골로 다니던 통골뱅이 집에서 레시피를 배워와 안주를 만들었다”며 “옛날 분위기를 살리는 데 방해될까봐 90년대 이후 출생자는 입장을 못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노래는 서태지 듀스 노이즈 이적 등 1990년대 댄스와 발라드 가요를 섞어 틀었다. 노래를 잘라 믹싱(mixing)하는 게 유행했지만 절대 중간에 끊지 않고 꼭 2절까지 틀었다. “음악도 시처럼 원작자의 의도를 지켜주고 싶었어요. 그게 음악을 만들어본 사람으로서 음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죠. 대신 재미있게 춤추고 놀 수 있도록 음악을 트는 순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노하우를 온전히 전수하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생 대신 정직원을 뽑아 음악 트는 법을 일일이 교육했죠.”

김 대표의 전략은 먹혔다. 밤사에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홍대 거리는 매일 북적였다. 최근 몇 년 사이 ‘응답하라 1994’와 ‘써니’ 등 복고 영화·드라마가 히트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그는 건국대·이태원·강남·강서구청을 비롯해 부산 해운대·서면 등 다른 지역 번화가에도 매장을 냈다. 김 대표는 “20년 전 DJ로 일했던 강남의 인기 나이트클럽 중 두세 곳을 사들여 ‘밤사’로 개장했다”며 “매장이 20여개로 늘고 외부 투자 문의도 많이 왔지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직영 전략을 고수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클론 DJ.DOC 코요테 김현정 쿨 등 90년대 인기 가수들을 직접 섭외해 ‘밤사파티’라는 대형 콘서트를 열었다.

위기를 넘어 ‘복고 전도사’로

사업을 키우면서 위기도 많았다. ‘밤사’를 그대로 베낀 모방 주점이 주변에 우후죽순 생겨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단순 베끼기’만 한 대부분 매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김 대표는 “건대에는 ‘밤이면 밤마다’라는 모방 주점이 생겼지만 몇 달 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며 “인스턴트식 영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무도 시설이 없는 감성 주점에서 춤을 추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와 위기를 맞았다. 김 대표는 “테이블 사이에서 손님들이 스스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행정청과 협의를 통해 문제를 잘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앞으로도 3040세대를 위한 ‘90년대 문화 전도사’로 남고 싶다고 했다. 조만간 자신의 노하우를 살려 1980~1990년대 인기곡을 담은 추억의 음반을 만드는 작업에도 들어갈 계획이다. 김 대표는 “3040세대는 외환위기의 와중에서 아등바등 일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며 “제대로 된 놀이 문화를 즐기지 못한 이들에게 계속 추억과 놀이의 장을 열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밤사는 갑을도, 위아래도 없는 곳이에요. 모두가 똑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함께 춤추고 즐깁니다. 사회에서 차별을 겪고,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3040세대가 치유받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도록 제대로 판을 깔아주는 게 제가 할 역할입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