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극단주의를 퇴치하는 튼튼한 해법
얼마 전부터 이슬람국가(IS)를 표방한 무장조직이 포로들을 집단학살하고 민간인 인질들을 참수하는 모습이 인터넷 등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또 바깥 세계에 공개할 뿐만 아니라 ‘파트와(fatwa)’라는 이슬람 판결로 정당화하는 행태는 그 어떤 문화적 상대주의로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일련의 만행들이 의도적이고 계획된 행동이라는 것은 알려진 바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 이슬람 수니파 무장집단은 이슬람이 서구를 압도했던 중세 칼리프시대의 이슬람국가를 재현한다며 무기력한 일상에 찌든 ‘외로운 늑대’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리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 세상은 울퉁불퉁하고 역사는 앞으로만 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대량살육과 파괴에 이어 테러 공격으로 미국 등 서방국가들까지 정복하겠다는 이들의 위협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진단에 소름이 끼친다.

외신에서 전하는 소식을 들으며 인류가 마주한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의문이 든다. 전 세기 말 현실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동서 이념 대결도 끝났다. 지구 도처에 중동의 화약고처럼 언제라도 터질 듯 끓는 분화구들이 많지만,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이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IS는 기독교도를 ‘십자군’이라 부르며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십자군 역사의 프레임을 걸고자 한다. 동맹국을 규합해 IS와의 전쟁을 시작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프레임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테러단체인 IS와 싸우는 것이지 무슬림과 전쟁하는 게 아니라고 역설한다. 이슬람세계 역시 IS를 이단시하고 이슬람과 혼동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21세기 최대의 도전은 폭력적 극단주의다. 극단주의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종교나 인종주의, 심지어는 환경과 생태계 지상주의를 내세운 극단주의가 있고 심지어는 경제정책이나 사회관, 계층관, 문화예술적 가치에 관해서도 극단주의가 준동해 왔다. 이 모든 극단주의들이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낳았고 그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폭력적 극단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IS에 도취한 멀쩡한 젊은이들이 내세의 영광을 꿈꾸며 죽음의 살육전에 뛰어들지 않았던가.

극단주의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극단주의는 또 다른 극단주의를 낳는다. 우리 역사는 ‘꼴통보수’와 ‘좌빨’의 끝없는 싸움들로 풍부하다. 한쪽이 악을 쓰니 다른 쪽도 악을 쓸 수밖에 없던 탓일까. 그러나 극단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또 다른 극단주의가 아니라 극단주의의 단호한 배격이어야 한다. 본연의 목적이나 가치에 충실하면서도 모든 것을 목적만으로 정당화하지 않는, 적극적이고 균형 잡힌 중용이야말로 극단주의를 퇴치하는 가장 튼튼한 해법일 것이다. 어중간하게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시시비비를 가려 중용의 길을 찾는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중용이 필요하다. 이젠 극단으로 치달아야 주목받고 또 결과야 어떻든 속 시원하다고 여기는 풍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용이 존중되는 사회, 그것이 선진사회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렵다. 더욱이 IS나 알카에다 같은 폭력적 극단주의에 대해서도 그런 말이 통할까. 미국이 주도하는 IS와의 전쟁은 우리에게도 피치 못할 딜레마로 다가온다.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고토 겐지의 비극이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미래가 연 단위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단락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2015년 지구촌과 한반도, 사람들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은 것 같다. 어제 아침엔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했다. 참담한 일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불거졌거나 배아 상태에서 스스로를 드러낸 많은 위험과 위협, 재난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그리고 뿌리 깊은 우환이 바로 극단주의의 위협이고, 그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게 엄중한 역사의 명령이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joonh@snu.ac.kr >